Chapter 3. 나의 우울증 탈출기(2)
뭘 해도 즐겁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살은 계속 찌고 꾸미는 것도 귀찮아져서 점점 못난이가 되어갔다. 거울을 보면 깜짝 놀라곤 한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부스스한 머리의 아줌마가 거울 속에서 날 쳐다보고 있다.
사실 거울도 잘 안 본다. 대학시절 거울공주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던 나지만 이제는 거울 보는 게 싫어졌다.
덩달아 사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싫다. 가끔 아이들 사진 배경에 덩치가 곰만 한 어느 아줌마의 뒷모습이 찍혀있다. 자세히 보니 나의 등짝이다.
얼마전 대학친구 아들 돌잔치에 갔다.
몇 년 만에 만난 친구 어머니는 나를 보시고
하시며 안타까워하셨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라 나름 열심히 꾸민 거라고 차마 말씀드릴 수 없었다.
'음, 내가 그 정도로 망가진 게 맞구나' 하고 사실을 인지했다.
몸의 이곳저곳이 아팠다.
설거지를 할 때마다 명치가 콕콕 쑤시고 숨이 잘 안 쉬어졌다.
그리고 아가씨 때는 없던 두통도 생겼다. 머리 여기저기가 아파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또 뭘 먹어도 소화가 잘 안됐다. 체한 것처럼 답답하고 속이 수시로 쓰렸다.
태어나서 이렇게 몸 상태가 안 좋은 것이 처음이었다.
당장 병원에 가서 위내시경을 비롯한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는 '이상없음'으로 나왔다. 위도 깨끗하고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의사 말로는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면 그럴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엔 '딱히 스트레스 받는 상황은 없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매일 머리가 띵하고, 낮에는 졸음이 오고 피곤한데도 밤에는 잠이 안 왔다.
뭘 해도 재미가 없고 의욕도 안 나고, 몸이 축 처지고, 온몸이 아프고, 어느 날은 기분이 너무너무 쳐져서 건들이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고, 가슴이 갑갑하고 숨이 잘 안쉬어졌다. 이런 증상들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 너무 오래였다.
긴 시간 동안 천천히 쌓여간 나의 스트레스가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나는 뭔가 재미나는 것이 생각나면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실패해도 괜찮았다. 뭘 하든지 그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매일매일 '정말 인생은 재미있는 것!'이라고 느꼈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생각난 것이 아무리 사소하고 간단한 것이라도 나에겐 힘든 일이었다.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까. 이제는 하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어차피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의 대부분을 할 수 없으니까. 그냥 나의 뇌가 동작을 멈춘 것 같다.
남편에게 내 우울증에 대해 상담해 보려 한 적이 있었는데 말을 꺼낸 것을 곧 후회하였다. 남편님은 한창 인생의 상승 괘도를 달리고 있는 중이셔서 나의 우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아이들을 떼 놓고 몇 년 만에 예전에 활동하던 만화동아리 동료를 만나러 오랜만에 홍대에 갔다.
홍대의 밤거리는 여전히 젊은이들로 북적댔고 외국인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내가 이 사람들 속에 섞여있다는 것이 (일단 옷차림새부터)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나보다 두 살이 많은 언니와 동갑인 친구 이렇게 셋이 만났는데 이 둘은 싱글이었다.
둘은 힘들어 보이는 나를 걱정해 주었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내 우울에 대해 털어놓았다.
친구는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뭐라도 좋으니 하루에 한 개, 나만을 위한 일을 해보라고 했다. 그림을 그리던가, 뭔가 만들던가, 글을 쓰던가, 책을 읽던가.
하지만 나는 너무 우울해서 그림을 그리거나 만드는 것은 도저히 못 하고 책도 집중이 안 돼서 한 줄도 읽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는 '일기'를 써보라고 했다. 한 줄이라도 좋으니까 나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 기분이 나아질 거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아주 작은 희망이 생기는 듯했다. 누군가가 나만을 위해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준 것이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아 두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당장 문구점으로 가서 연보라색 다이어리를 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이들을 재우고 혼자 책상에 앉았다. 머릿속의 생각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해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막상 펜을 들었지만, 한 줄을 쓰기가 망설여졌다. 어색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러다가 하루, 이틀, 일주일... 점점 더 많은 일들을 일기로 기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 귀퉁이에 그림도 그렸다. 일기를 쓰는 시간은 짧으면 오분 길어야 삼십분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은 오로지 나의 다짐, 나의 이야기, 내 생각, 내 느낌에 집중할 수 있었고,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행위들이 앞으로 내가 창작을 할 수 있게 하는 작은 불씨가 되어주었다.
일본에 있을 때 미래의 다짐들을 수첩에 기록하며 되새겼던 것처럼 난 다시 이 다이어리에 '난 꼭 다시 할 수 있다' '다시 그릴 수 있다''멋진 사람이 되자''다시 돈을 벌 수 있다'같은 나의 다짐들을 써나가며 네버엔딩 육아와 살림의 굴레 속에서 또 우울증과 사투를 벌이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