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나의 우울증 탈출기(1)
첫째가 5살,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 '우울증'이 찾아왔다.
까다로운 첫째를 키울 때는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우울증에 빠질 정신이 없었고 둘째를 낳았을 때는 갓난아기와 기관에 적응 못한 3살 첫째를 같이 키워야 해서 정말로 정신이 없었다.
엄마 껌딱지인 첫째가 유치원에 입학하게 되고 순한 둘째가 3살쯤 되고 나니, 그동안 육아에 초 집중했던 나의 모성 에너지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버린 것처럼 허탈감과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그것은 우울증이었다.
육아 5년 차.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다.
결혼 전, 놀기도 열심히 회사일도 열심히 취미생활도 열심히였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집에 12시 이전에 들어가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만나는 사람들도 많고 하는 일도 많아서 다들 그렇게 바빠서 괜찮냐고 걱정할 정도였다.
정말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다양한 일들을 하며 하루 일분 1초도 아깝게 오로지 나를 위해 바쁘게 살았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5년이라는 세월 동안 대부분을 집과 동네를 오가며 지냈고, 주로 만나는 사람은 아줌마 친구들 아니면 가족뿐이었다. 늘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나의 일을 사랑했던 내가 5년이라는 긴 시간을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나 자신을 꾹꾹 누르며 힘겹게 버티다 드디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래도 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집에서 웹툰 그리는 일을 했었다.
방에서 혼자 웹툰을 그리는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로지 나한테만 집중할 수 있었고, 또 일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 있어서 자부심과 보람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간만큼은 엄마가 아니라 나로 있을 수 있는 것이 작은 행복이었다.
그러나 둘째를 임신하고 출산하게 되면서 두 아이를 데리고 도저히 일을 계속할 자신이 없어서 결국 모든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원인에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가까이 살고 계시는 시부모님과 남편이 내가 육아와 살림 이외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이유도 있었다.
그때는 그 일이 나의 마지막 남은 자존감을 붙잡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일을 그만두고 애 키우기에만 전염한지 한해 두 해가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당장 육아를 그만두고 싶었다. 나도 살림과 육아 말고 잘하는 일을 해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무리였다. 당장은 무리였다. 생일도 늦은 둘째가 4살이 되려면 아직도 1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1년만 기다리면 될까? 그때가 되면 누가 나에게 일을 줄까? 이미 손과 머리가 바보가 되어버렸는데 내가 다시 그림을 그릴 수나 있을까? 창작을 하는 사람은 예술적 감성을 풍성하게 해줄 좋은 자극을 많이 받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매일 보고 느끼는 것이 뻔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오늘 저녁 반찬은 뭐 하지?' '오늘은 아이가 유치원에서 울지 않고 잘 지내야 할 텐데' '둘째 기저귀는 언제 떼지?' '오늘은 애들 문화센터 가는 날이네. 돌아올 때 애들 병원도 들려야겠다' '남편이 요즘 일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걱정이다' 이런 생각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몇 년 동안 제대로 책 한 권 그림 한 장 감상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창의적인 발상이, 예술적 감성이 살아날 리 없었다.
시간은 흘러 둘째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쯤 남편은 어느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IT 관련 서적을 집필하게 되었다. 그동안 남편은 IT 학원을 운영하면서 프리랜서 개발자로서도 활동하고 앱도 여러 개 출시하였다. 유튜브를 비롯한 다른 유료 동영상 강의도 론칭하면서 꾸준히 자기 분야에 공을 들여 인지도를 쌓은 결과였다.
처음엔 그런 남편이 자랑스럽고 내 일인 것처럼 기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본인의 분야에 차곡차곡 이력을 쌓아가는 남편과 시간이 흐를수록 살림과 육아 스킬만 늘어가는 나 자신이 점점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책 읽기를 누구보다 싫어했다던 남편이, 책을 내고 작가가 되다니, 뭔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되었다.
어느 날은 본인이 작가라고 거들먹거리길래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적이 있다.
난 남편이 내 말의 속 뜻을 이해하고 조금은 위로해 줄줄 알았는데, 그 말을 들은 남편은 불같이 화를 내며, "내가 잘 되는 게 당신이 잘 되는 거 아니야? 난 우리가 한 팀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실망이야!"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아... 내가 지난 수년 동안 피 X 싸게 나 자신을 희생하며 우리 가족을 위해 살았는데, 그걸 인정해 주는 사람은 결국 아무도 없었구나!'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왜 난 나로 인정받지 못하고 남편과 세트가 되어서 남편의 출세를 내 출세인 양, 그것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걸 당연하게 여겨야 하는 거지?
난 너무 속상하고, 그동안의 세월이 야속해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