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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스타일.

Chapter 3. 나의 우울증 탈출기(5)

by 온다정 샤프펜

시간이 조금 더 흘러 4살이 된 둘째가 드디어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다.

살림할 시간을 빼고 나면 나에게 작은 여유가 생긴 것이다.

어린이집 적응 기간이 끝난 첫날 홀로 설레는 맘으로 집 근처 도서관에 들렀다.

운이 좋게도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위치에 큰 도서관이 새로 생겼다.

그곳에서 '하루키 스타일'이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그 유명한 '상실의 시대'도 읽어보지 않았다.

사실 몇 년 전에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라는 하루키의 에세이 모음집을 우연히 읽게 되면서 일본의 유명한 작가라는 걸 알게 된 것뿐이다.

그 책을 읽고 크게 느낀 점은 단순했다.


'아주 유명한 작가는 돈을 많이 버는구나.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글을 쓸 수 있구나! 무지 부럽다 !'


외국 어느 나라에서 무엇을 먹었고, 작은 해프닝이 있었고, 자신의 취미는 이러쿵저러쿵...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별로라든지. 자신의 시시콜콜한, 지극히 개인적인 신변 이야기들을 약간 거들먹거린(?) 다는 느낌으로 쓴 듯한 책이었다.(순전히 나의 소감)

그 당시에도 육아와 살림의 반복되는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아니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지하게 힘들어서 한 시간 만이라도 저 멀리 외국이나 다른 행성으로 도망하고 싶다고 수도 없이 생각하였다.)을 살고 있는 내게 있어서 꿈속에서나 일어날 것 같은 하루키 작가님의 일상이 꽤나 부러우면서도 흥미로워서 현실도피하는 기분으로 그 에세이 시리즈를 몽땅 사서 읽었던 기억이다.(이때부터 무의식적으로 작가에 대한 로망이 생겨난 것인지도...)

'하루키 스타일'이라는 책은 하루키가 쓴 책은 아니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라이프 스타일을 정리해 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뭣도 몰랐던 하루키에 대한 나의 편견은 그 책을 읽고 싹 사라지게 되었다.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엄청난 내공의 사람이었다.

하루키는 작가로 데뷔하고 나서 할아버지 작가(죄송)가 된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고 달리기를 해 왔다고 한다.

국내에 있건 해외에 있건 휴가를 떠났건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분량의 시간만큼의 글을 썼고, 오로지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유지하며 글을 쓰기 위해 오랫동안 달리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키는 목적이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다. 유명한 작가가 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글 쓰는 것이 너무너무 좋아서 매일매일 글을 쓴다고 한다.

하루키는 글쓰기와 달리기 이 두 가지의 약속을 하루도 빠짐없이 실천하면서 철저하게 절제된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단 번에 이루어진 명성이 아니었다.

글쓰기에 대한 하루키의 진지한 자세와 그 열정에 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하루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나도 하루키처럼 해 보기로 했다.

하루 일과 중 최대한 내 시간을 많이 내기 위한 계획을 짰다.

집안일을 안 할 수는 없으니. 아침 일찍 일어나 식구들이 깨기 전에 아침밥과 청소 빨래 돌리기 등을 해 놓고 아이들을 기관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글을 쓰기 위한 건강한 육체를 만들기'에 필요한 조깅을 한다.

집에 오자마자 다 된 빨래를 널고 아침 설거지를 마친다. 빠르면 10시 반 늦어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4시간에서 4시간 반 정도 내 개인 시간이 생긴다. 첫째 낳고 만 5년 만에 얻은 자유 시간이다.

하루키는 자신이 정해 놓은 시간에는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책상에 앉아있는다고 한다.

그렇게 몸을 단련시켜 놓으면 혹여나 슬럼프가 와도 책상에 앉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은 것이다.

밥 먹는 시간을 빼고 4시간 정도는 무조건 책상에 앉기로 정했다. 마땅히 쓸 것이 없어도 노트북을 켜고 뭐라도 쓸만한 것이 떠오를 때까지 말이다.

드라마를 볼 시간도 낮잠을 잘 시간도 아깝다. 난 이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거다!

그러나 의욕이 앞서기 전에 수습해야 할 몇 가지가 있었다.

미리 수강해 놓은 요가 수업이 일주일에 두 번이다. 그것도 12시부터다. 참 애매한 시간대다.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캔슬 할까 심각하게 고민해 보았다. 그러나 요가 후의 아줌마들의 대화 속에는 의외의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다. 왠지 글을 쓸 때 좋은 소재가 될 것 같다. 작가는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내 놓으니. 갑자기 몸의 이곳저곳이 아프다고 신호를 보낸다. 안과 이비인후과 부인과 치과 등 그동안 미루고 미뤘던 병원 진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

또 머리 스타일은 왜 이리 촌사람인지. 부쩍 늘어난 흰머리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글도 글이지만 일단 미용실부터 다녀와서 사람이 되어야 할 듯하다.

오늘은 정말 맘잡고 글을 써보려는 찰나 이제 막 친해진 아줌마 그룹에서 밥 먹으러 오란다. 매몰차게 거절했다간 가득이나 친구도 별로 없는 아파트에서 나만 소외될 것 같다.

집으로 바겐세일 안내 책자가 도착했다. 앞 집 아줌마와 몇 달 전부터 벼르고 있던 세일이었다. 이번에 놓치면 가게에 어마어마한 타격이 올 것 같다.

아줌마 생활을 너무 오래 했나 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뭣이 중헌지가 잘 파악이 안된다.

그랬다. 난 하루키가 아니었다. 게다가 난 성실한 편도 아니었다. 내 삶을 미루어 봤을 때 뭔가 꾸준히 한 기억이 없다. 항상 의욕은 세계 최강인데. 끈기가 없다.

두렵다. 또 이제까지와 똑같은 인생을 살까 봐.


봄에 계획을 세워 놓고 어느새 한창 더운 여름이 되었다. 몇 개월이 흐를 동안 계획대로 하루나 제대로 보냈을까.

'결국 내게 드라마틱한 인생은 펼쳐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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