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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Chapter 3. 나의 우울증 탈출기(6)

by 온다정 샤프펜

이제 겨우 두 아이가 기관에 다니게 되어 몇 년 만의 자유의 낮 시간이 생겼는데, 난 멍하니 책상에서 그 황금 같은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뭔가를 열렬히 원했지만 너무 긴 시간 동안을 나 자신을 잊고 살아서인가?

도무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뭘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막연하게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머릿속이 하얀 백지처럼 비어있는데


'대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주제 파악도 못하고 뜬구름 잡는 생각을 했나 싶었다.

예전의 내 끼와 재능 그리고 열정은 사랑스러운 두 아이에게 모두 남김없이 나눠 주었나 보다.

너무 우울한 생각들을 많이 했는지. 이제 애 좀 키웠다 싶어서 몸의 긴장이 풀려버렸는지.

결국 난 이름도 생소한 '불치병'에 걸리고 말았다.


때는 더운 여름날이었다. 둘째도 다 컸다 싶으니 집 안의 너저분한 장난감과 물건들을 해치우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마침 광명에 가구 인테리어 대형 매장인 '잇케아'가 핫할 때였다.

핫하다고 하니 '나도 한번 가보자' 호기심 차 들른 잇케아는 입이 떡 벌어지게 예쁜 가구와 인테리어 소품들로 가득 차 있었고 집 꾸미기에 대한 나의 의지를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다.

이참에 안 쓰는 장난감과 아기용품들을 싹 버려버리고 집을 새롭게 꾸미자고 마음먹은 것이 큰 화를 불러일으킬 줄은.

먼저 집을 예쁘게 꾸미기 위한 필수 코스인 선반 달기에 도전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드릴로 시멘트 벽을 뚫는 고급 기술이 필요했다.

이상하다. 다른 집 말로는 남편이 별로 힘들이지 않고 선반을 설치했다고 했다.

그리고 나의 과거를 회상했을 때도 아빠가 시멘트 벽에 대 못을 땅땅 박거나 드릴로 벽을 슝슝 뚫으셨던 기억이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 집에 있는 남자도 잘 하려니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부탁을 했으나 세상엔 많은 종류의 남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세 개의 못을 힘겹게 박던 남편은, 분명 벽에 철근이 1센티 간격으로 박혀 있는 거라며 더 이상의 못 박기를 거부했다.

난 너무너무 선반이 달고 싶었다. 그래서 차라리 내가 하자 생각하고 드릴을 들고 젖 먹던 힘까지지 쏟아부어 드릴질을 해댄 끝에 무사히 선반은 달았지만 난 가슴의 병을 얻고 말았다.

이게 웬 무식한 얘기냐 하겠지만 드릴을 박을 때 마땅히 힘줄 곳이 없던 난 어차피 없는 가슴이니 괜찮을 거라며 나의 중요(?) 부분에 힘을 지탱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벽을 뚫었던 것이다.

나의 아름다운 선반을 설치한 날 밤, 난 기쁨과 뿌듯함에 설레며 잠이 들었고 다음 날부터 극심한 가슴 통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서둘러 가까운 유방외과를 찾아갔다.

첫 번째로 간 유방외과에 가서 나의 바보 같은 일화를 털어놓자 여 의사선생님은 별것 아니라며 가슴에 축구공 맞고 오는 환자를 비롯한 여러 환자들이 찾아온다고 날 안심시켜 주셨다.

항생제 처방을 받고 나서 얼마간은 통증이 잦아든 듯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 수 록 가슴의 통증이 다시 극심해졌고, 예사 병이 아니라는 생각에 좀 더 유명한 유방외과를 찾아갔다.

그러나 이 병원에서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됐다.

가슴에 온통 염증이 퍼져있는데 그 염증의 모양이 암세포와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어마 무시한 기계를 가슴에 쑤셔 넣어 생 살을 뜯어내는 조직 검사를 마친 후 가슴에 붕대를 칭칭 감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에게 티도 못 내고 검사 결과를 얼마 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갑자기 큰 아이가 응급실에 가게 됐다. 내 가슴이 아픈지 어쩐지 살필 틈도 없이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그날 밤, 병실 침대에서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고 나서 겨우 간이 소파에 몸을 누이고 나서야 가슴의 깊은 곳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상처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갑자기 터져 나온 눈물이 주체가 안되었다.

아이가 아픈 것도. 내가 아픈 것도. 꿈인 것 같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나.

이제 좀 내 삶을 살아보려나 했는데 모든 게 엉망이 될 것만 같았다.

인생을 통틀어 그렇게 슬퍼했던 날이 있었던가.

주변에 위로받을 이 하나 없이 깊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엄마가 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가. 많은 생각에 잠겼다.


수 일이 지난 후 아이는 안정을 찾게 되었고, 다행히 나의 검사 결과도 암은 아니라고 나왔다.

나의 병명은 이름도 생소한 '육아 종성 유방염'이라는 면역에 관한 신종 병이었다. 드릴 때문에 생긴 병은 아니고 예전부터 염증이 있었던 걸 모르고 있다가 오히려 그 사건으로 발견하게 된 셈이었다.

이 병은 면역세포의 이상으로 자신의 정상 세포를 적으로 여겨 스스로 공격하여 염증을 만드는 병이었다.

그래서 이병은 어떤 독한 항생제도 듣지 않는다. 딱히 치료법도 치료 약도 없다. 의사들조차 생소한 일종의 불치병이었다.

항생제란 항생제는 다 써보았지만 전혀 차도가 없어서 큰 대학병원으로 옮겼다. 다행히 그곳의 의사선생님은 이 병을 잘 알고 계셨다. 이 병의 유일한 치료법은 가슴 안의 염증으로 인해 생긴 고름을 주사기나 고름을 빼는 치료를 계속해서 고름을 빼면서 경과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1년~2년 안에 염증이 잡힐 수도 있지만, 재발이 높은 병이라 평생을 가지고 갈 각오를 해야 하는 병이라고 했다.

더욱이 나를 슬프게 했던 건, 주로 이병에 걸리는 것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젊은 엄마들이 걸린다는 것이다. 면역에 관한 질병이 대부분 그렇듯이 잘 못 먹고, 스트레스받고, 피곤하면 걸리는데 이것이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이 많이 취약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난 못 먹어도 애들이 먹는 걸 보면 내가 먹은 것 같은 착각에 과일 한 쪽 챙겨 먹을 정신도 없었다.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이 매일 잠 못 자고 피곤한 건 당연하고 집안 일과 육아에 시달리며 창살 없는 감옥살이 중이니 하루하루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다.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을 뒤져보니 나와 같은 병으로 고통받는 아기 엄마들이 상당히 많았다. 모두들 생소한 이 병에 딱히 치료할 병원도 약도 없어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 후로 6개월 동안 치료에 전염하여 운 좋게 염증이 더 이상 퍼지는 것은 막았지만 현재까지도 내 가슴에는 한눈에도 보이는 커다랗고 빨간 염증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의사는 나에게 남아있는 가슴 안의 염증이 화산의 휴식기라고 했다.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른다고.

하지만 이 병에 슬퍼하며 황금 같은 시간을 흘려보낼 수 없다. 터지면 그때 다시 병원에 열심히 다니면 된다.

지금은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이 불치병 따위가 내 의지를 꺾을 수는 없다!

간혹 가슴이 찌릿찌릿 하긴 하지만 난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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