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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 일거리를 만나다.

Chapter. 4 나의 진짜 행복찾기(2)

by 온다정 샤프펜

결혼 후 7~8년을 집에서 애만 키우던 내가 뜬금없이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후, 여전히 같은 삶을 벗어날 수 없는 내 빈약한 의지력과 갑자기 찾아든 병마(?)와의 사투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작가의 꿈을 언제 꾸었냐는 듯 내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졌다.


그 무렵, 난 내 정체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과연 난 뭘까?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뭘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너무 오랫동안 집에 있었기 때문에 뭐가 됐든 "이젠 사회로 나가고 싶다! "였다.

워낙에 활동적인 성격이었던 내가 집구석에서 한정된 일만 하면서(주로 육아와 살림) 오래 버티었다 싶었다.

직업도 없고, 일도 없고, 명함도 없고, 비행기 탈 때 직업란에 하우스 와이프라고 쓸 수밖에 없는 아무것도 아닌 내가 이젠 정말 지겹고 창피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뭣이 모자라서!! 이러려고 울 엄마가 힘들게 나 대학 공부까지 시켰냐!!

뭐 하러 회사서 빡세게 야근하면서 커리어를 쌓았냐!'


날 쓴다고 하는 곳만 있다면 어디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경력을 살리려면 디자인 회사에 취업해야 하는데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분야라서 아직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나는 무리였다. 물론 애들이 다 크면 더 무리다. 누가 디자이너를 할머니를 고용하겠나.

애들을 케어하면서 경력을 살릴만한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다.


역시 사람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자극을 받아야 발전한다.

그때 밴드가 막 결성되어 활발히(?) 활동할 때였는데, 알고 보니 건반을 담당하고 있는 엄마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강사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엄마는 일본어를 전공하고 무역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결혼 후 육아에 전념. 둘째가 어린이집에 가게 되면서 새롭게 일을 시작한 것이다.

수업이 있는 날만 학교에 출근하면 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케어하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래서 어른들이 여자는 선생이 딱이라고 하셨나 보다. 결혼하고 보니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한정적이다.


어느 날 밴드 아줌마들끼리 모여서 행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난 아직도 육아 우울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의 삶의 만족도, 행복도를 따지면 결혼 전의 반의반도 안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4세 이전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를 제외하고, 경제적으로도 크게 문제가 없다고 가정했을 때 엄마들의 삶의 만족도는 꽤 높았고 정서적으로도 안정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와 몇몇 소수의 엄마들(주로 나의 친구들)만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채 '절규'하고 있었다.

나의 행복에 대한 물음에 건반을 담당한 엄마가 말했다.


"전 요즘 엄청 행복해요. 결혼하고 전공을 살려서 일을 할 수 있을지 몰랐는데, 학교에서 일하면서 돈도 벌고 애들도 케어할 수 있고, 강사 일도 성격에 맞고 보람 있어요. 게다가 요즘은 제 꿈인 음악 활동도 할 수 있게 되어서 제 삶에 너무 만족합니다."

애들 나이도 같고 사는 수준도 비슷한데, 내 행복지수는 바닥인 거 보니, 역시 사회생활을 안 해서인 것 같다.

나도 강사를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일도 생기고, 돈도 벌고, 육아와 살림을 병행할 수 있고, 내 자존감도 팍팍 오를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분야의 정보가 별로 없었다. 난 어떤 강사를 해야 하지? 그림? 컴퓨터?

하고 싶은 분야가 확실해 지자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조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무작정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방과 후 교사와 기간제 강사가 되기 위한 인터넷 카페가 많이 있었다.

나만 이쪽 일을 모르고 있었는지, 인터넷 카페 안에는 다시 일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 엄마들의 글로 가득했다.

면접을 봤는데 불합격했다는 이야기, 방과 후 교사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는 이야기, 경력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기관에서 거의 무보수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 등 재 취업을 하고 싶어 하는 엄마들의 열의가 상당했다.

다들 기본으로 자격증을 서너 개씩 갖고 있고, 이쪽 분야로 1년 이상 준비하거나, 벌써 여러 번 면접을 본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내 주변에 바느질로 방과 후 보조 강사 일을 했던 엄마가 있었는데 그 엄마도 인맥이 있어서 운 좋게 연결이 되었다고 들었다.

난 자격증도 하나도 없고, 아이들을 가르쳐 본 경력도 없고, 인맥도 없는데. 언제 준비해서 언제 일하나. 카페 안의 사람들의 기에 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들 이렇게 열광적으로 원하는 일이라니! 나도 한번 해보자!라는 오기가 들었다.

그 카페에는 강사가 되기 위한 공략 정보가 담겨있는 동영상 강의도 서비스하고 있었는데, 그날 난 늦은 새벽까지 그 공략을 독파하기 위해 잠을 잘 수 없었다.

그 공략들 중에는 방과 후 교사 채용이 보통 연말에 시작돼서 다음 해 1월에는 거의 채용이 끝나기 때문에 3월 이후에는 지원자가 현저히 줄어들지만, 이때에 틈새를 공략하여서 간간이 뜨는 채용공고를 눈여겨보면 쉽게 강사 자리를 구할 수도 있다는 정보였다. 그때는 3월 말이었고 이거다 싶었다!

다음날 막 12시를 넘긴 새벽. 교육청 사이트에서 눈빠지게 구인란을 검색하던 중. 내 눈에 쏙 들어오는 구인이 있었다.

'ㅇㅇ중학교 자유학기제 웹툰 선생님 급구!' '위치는 ㅇㅇ 신도시'

중학교에서 웹툰을 가르치다니! 정말 상상도 못했다. 시대가 이렇게 변했구나 싶었다. 정말 후벼파면 쥐구멍이라도 나오나 보다. 결혼 전과 결혼 후 둘째 낳기 전까지 프리랜서 웹툰 작가로 일을 했었는데, 이 경력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만세! 난 너무 기뻐서 마음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게다가 위치도 여기서 3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마감 날짜를 보니, 이럴수가! 마감이 이제 밤 12시를 넘겨 어제까지였다.

지금 이력서를 보내도 벌써 다른 강사를 구하였거나, 마감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진정성 있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그리고 강의 계획서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을 공들여서 썼는데 신기하게도 전혀 피곤하거나 졸리지 않았다. 무사히 이력서를 보내니 저 멀리서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이미 마감 날짜도 지난, 이 불확실한 한 통의 원서를 쓰기 위해 밤을 꼴딱 새웠는데도 시간이 아깝거나, 후회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정말 오랜만에 절실하게 원하는 일에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는 것에 뿌듯한 마음이었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이런 말이 있다. 역시 잠 안 자고 밤새 두드리길 잘했다. 자판을.

그날 아침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담당 선생님으로부터의 전화였다.

놀랍게도 날 당장 채용하고 싶다고 하셨다. 사람 구하기가 참 힘드셨나 보다. 생각해 보니 잘나가는 웹툰 작가들은 대부분 현업에서 자기 거 그리느라 바쁘다.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기 위해 교육청 홈피를 둘러보진 않을 듯하다.

나처럼 웹툰을 그리다 경력 끊긴 아줌마가 딱인 것이다!

그리하여 난 면접과 동시에 바로 정규 수업에 투입되었고, 나의 사회 복귀는 떨림과 긴장을 느낄 틈도 없이 그렇게 급작스럽게 시작되었다.

첫 출근 날, ㅇㅇ까지 가는 시골길을 신나게 달렸다.

오랜만에 소싯적 즐겨듣던 *엘르가든의 시디를 틀었다.

쿵쾅거리는 음악소리, 탁 트인 시골 풍경. 결혼하고 처음으로 느끼는 끝내주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날 억압하고 있던 것들을 시원하게 한방 날려 버린 것 같았다.

요 몇 년 간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혼자 달려간 적이 있었던가?(아니 없었다. 아기 엄마가 가긴 어딜 가.)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집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이렇게 기분이 상쾌해질 줄은 몰랐다.


*Ellegarden - 일본의 록 그룹으로 'Make A Wish'라는 월드컵 홍보(?) 곡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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