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나의 진짜 행복찾기(4)
20대 디자이너이던 시절. 가끔 텔레비에서 드라마 방송작가 모집 광고를 볼 수 있었다.
당시 난 글을 제대로 써 본 적도, 글 쓰기를 배워 본 적도, 주변에 글을 쓰는 사람도 없었는데. 막연하게 '드라마 방송작가'라고 하니 이름만 들어도 왠지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나도 국문과를 나왔으면 좋았을라나?' 하고 잠깐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까지 만화를 만들기 위한 콘티나 스토리 작업의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짬을 내서 한번 도전해 보았으면 좋았겠지만. '방송 공모전은 전공한 사람들이나 도전하는 것'이라는 고지식한 생각에 갖혀 난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파파 노인들에게 인생을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뭐냐고 물으면 '더 과감하게 많은 일에 도전해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그때의 난, 지금보다 더 닫힌 생각을 했던 것 같다.
20대 중반이나 후반은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린 나이고 뭐든지 도전해도 될 나이인데 그때의 나는,
라며 마음의 울림을 쉽게 외면 하곤했다.
하지만 사실은 열심히 놀고, 열심히 일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고 치열했던 20대엔 다른 분야에 도전할 만한 여유나 생각이 없었을지 모른다.
결론은, 폭풍우 같던 20대 시절을 보내고, 결혼후 살림과 육아에 찌든 암울한 30대를 지나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4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야
이라며 이제야 아무도 모르게 도전해 볼 마음이 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난 난생처음 '드라마 극본'이라는 걸 쓰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노트북을 장착하고 투썸에 출근하였다.
일단, 드라마 극본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도 없으므로, 드라마 시나리오 공모전 카페에 가입을 했다. 카페 안에는 절실하게 등단을 꿈꾸는 작가 지망생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본인의 작품을 평가해 달라는 글부터 공모전에 당선된 작품을 다운받거나, 글쓰는 법이나 드라마 극본에 쓰이는 용어정리까지 글을 쓰는데 필요한 많은 정보들이 있었다. 전혀 모르고 있었던 세계인지라 난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여러 곳의 공모전 정보도 있었는데, 그중에 난 티0엔 드라마 공모전에 내기로 결정하였다.
소재도 없는데 벌써 어느 공모전에 낼지 결정하다니, 역시 무대포 근성의 나였다.
우선, 작년도 티0엔 드라마 공모전 당선작의 자료를 다운받아 읽기 시작했다. 단편이기도 하고 대부분 대사 형식의 글이라 한 편을 읽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본 시나리오는 주인공이 50대 중년 아줌마인 스토리였다. 가족을 위해 평생을 희생해온 평범한 가정주부가 우연히 당구를 배우게 되고, 본인도 알지 못했던 당구의 재능을 발견하여 남편과 가족들 몰래 당구 선수로써 제2의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는 이야기였다.
뭔가, 엄청난 반전이나 극적인 재미는 크게 없었지만, 무리 없이 흘러가는 스토리에 내용도 어느 정도 공감가고, 감동도 있었다. 바로 이거다! 이 정도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라는 어디서 생긴 자신감인지. 여하튼 무식이 용감이라고 이 분야에 아는 것이 없는 난, 거침없이 덤벼들었다.
우선 소재를 정하는 것이 먼저였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글 쓸 때 제일 좋은 소재는 '나 자신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소재를 찾기 위해 나와 내 주변의 인물들을 생각해 보았다.
뭔가 평범하지만 재미있는 소재가 없을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머리를 탁 치는 좋은 소재거리가 생각났다.
바로 남편이다. 눈치챘는지 모르지만 남편은 엄청난 구두쇠, 스크루지였다. 태어날 때부터 스크루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남편은 어릴 때부터 최근 에피소드까지 절약과 관련된 소재가 무궁무진했고 들을 때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재미있는 일화가 많았다.
일상이 절약인 어느 평범한 가장의 이야기. 스쿠루지 오과장... 뭔가 남편에게 딱 떨어지는 수식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제목은 '스크루지 오과장!'이야!
남편과 스크루지라는 단어가 떠오르고 3초 만에 제목을 정했다. 그동안 남편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무작정 쓰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서 인가? 꾸며낸 이야기라서인가? 집에서 끌적끌적 에세이를 썼을 때를 생각하면 비교적 술술 잘 써졌다.
내용이나 완성도는 어떨지 몰라도 별 막힘없이 잘 써져서 쓰면서도 스스로 놀라울 정도였다. 혹시 내가 시나리오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는데, 그동안 모르고 있었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심지어, 내가 쓰다가 재밌다고 박장대소하면 미X뇬 소리 듣겠지만, 작품성이야 어쨌든 '재밌다' '웃기다'를 연발하며 신나게 써 내려갔다.
70분짜리 단막극 시나리오를 쓰는데 대략 1주일에서 열흘 정도 걸린 것 같다. 아이들이 원에 간 후에는 투썸에서 원고를 썼고, 어느 날은 아이들 저녁을 먹이고 홀로 나와 마트 문화센터 간이 테이블에서 쓰기도 했다.
물론 중간에 막히는 부분도 있었고, 대대적인 수정도 해야 했지만, 무사히 마감 날짜 안에 원고를 보낼 수 있었다.
처음 써보는 형식의 원고라 정해진 형식에 맞추어 쓰느라 용어나 형식에 대한 공부도 필요했기에 카페에서 찾아보거나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며 공부를 했는데, 학교 다닐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좋았겠다 싶을 정도로 머리에 어찌나 쏙쏙 들어오는지. 뭔가 새로운 것을 할 때의 나의 에너지가 엄청나구나 하는 것을 또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작품 마감이 되고, 몇 천편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많은 작가지망생들의 부푼 기대감을 공감하며, 발표 날을 기다렸다.
발표를 기다리며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를 상상을 해 보았다.
등 상상이라기 보다 망상에 가까운 생각들을 하며 즐거워했다.
발표까지 꽤 여러 달이 흘러야 했으므로 난 공모전을 잠시 잊고 현생을 살아야했다.
드디어 발표 당일! 수십 번씩 공모전에 미끄러지는 국문과 전공자들도 많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내가 한 번에 당선될 거라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지만. 두둥! '1차 탈락'이라는 당연한 결과를 보니 조금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지만, 혹시 나만은 영화의 주인공처럼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거 아닐까하는 실낱같은 기대감을 가졌던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예전 텔레비프로그램에서 드라마 시그널의 김은희 작가님에 대한 썰을 들었는데, 작가 데뷔 전에는 평범한 주부로 남편인 장항준 감독님을 도와 시나리오 대본을 대신 쳐주는 일을 하다가, 어느 날 나도 한번 써보자!라는 생각에 글을 쓰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그 이야기가 어찌 보면 내가 드라마 원고를 써보고 싶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사실 김은희작가님은 그냥 평범한 주부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하하.
여튼 난 평범한 주부이기에 원고를 완성하여 공모전에 출품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칭찬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평범한 어떤 것을 꾸준히 하다 보면 그것들이 쌓여서 특별한 그 어떤 것이 될지 모르니.
그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며 난 오늘도 투썸에 출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