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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프펜 Dec 15. 2023

매일 밤 '102호실로 가다'

[19호실로 가다]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주인공 수전은 여자로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상적인 삶을 사는 듯이 보인다.

잘생기고 돈 잘 버는 남편 그리고 사랑스러운 네 아이들, 정원이 딸린 큰 주택과 자동차 그리고 입주 가정부는 집안일은 물론 아이들 케어와 식사준비도 도와준다.

그러나 수전은 10년 동안 살아온 엄마와 아내로서의 역할이 자신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는다.

완벽하고 지적인  아내가 되기 위해 남편의 하룻밤 바람도 쿨하게 눈감아 주었던 수전이다.

그러나 수전에게는 남편의 외도보다 '나 자신'을 잃어가는 것이 훨씬 큰 고통이었다.

눈에 헛것이 보이며  정신적으로 서서히 지쳐가던 수전은 자신이 살아갈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스스로 찾게 된다.

그것은 바로 현실의 자신을 내려놓고 완전히 고립된 '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수전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7시간 동안 안락한 자신의 집을 떠나 허름한 호텔의 19호실에 머문다. 수전은 거기에서 '완벽한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수전은 그 호텔에 있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침대에 눕지도 않고 그저 의자에 앉아 자신이 지금 혼자고, 이 세상 누구도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안도감과 기쁨을 조용히 누릴 뿐이다.

그러나 수전이 유일하게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이 쉼터마저 남편의 의심으로 발각되고 만다.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는 수전을 남편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수전이 그 호텔 방에서 바람을 피웠을 거라는 생각이 남편에게는 더 상식적인 일이었다.

그동안 19호실이 있었기에 수전은 자신의 삶과 가정에 더 충실할 수 있었다.

수전에게 그곳은 살아갈 이유였다. 안식처를 잃은 수전은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고 느꼈고 결국 19호실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한창 어린아이 둘을 키우던 시절.

3살 배기 둘째를 겨우 재우고 나면 한두 시간 정도 나만의 시간을 쓸 수 있었다.

하루종일 아이들과 집안일에 시달린 나의 지친 육체와 정신을 달래기에 한두 시간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 자투리 시간을 유용하게 써봐! 취미생활이나 자기 계발을 하던지 아님 신나게 놀면서 스트레스를 풀어!'

아니, 난 그저 멍하니 숨을 고를 뿐이었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몸과 정신을 쉬게 하고 싶을 뿐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내일의 힘든 육아를 위해 둘째의 옆자리 좁은 틈새를 비집고 눕는다.

너무 피곤한데 정신은 뭔가 맑다. 쳇바퀴 같은 내일의 육아와 살림 걱정에 눈물 한 방울이 또로로 흐른다.

이때는 절실히 필요했다. 

나만의 19호실이.


그리고 세월이 흘러 흘러 뜻밖에도 19호실 같은 102호실이 생겼다.

우연하게도 지금 난 수전처럼 주택에 산다.(물론 수전처럼 호화로운 주택은 아니지만)

우리는 2층에 살고 1층에는 두 개의 세를 주는 집이 있다.

그중 102호실에 살던 신혼부부가 이사를 가게 되었고 새로운 어린 동거인 커플이 들어왔다.

그런데 아파트에만 있을 줄 알았던 층간소음 문제가 우리 집에도 생길 줄이야. 

코로나 시국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집에 있던 102호실 남자는 아이들의 쿵쾅거림을 참지 못하고 여러 차례 항의 문자를 보내왔다. 

우리는 그때마다 죄송하다는 답변을 보냈고 실내 계단에는 코일매트까지 깔았다.

아이들에게도 항상 주의를 주고 우리 부부도 언제 문자가 올지 몰라 노심초사하며 조용히 지냈다. 

그러나 집이 잘못 지어진 건지, 그 남자가 초 예민남이었던 건지 결국 그 커플은 이사 온 지 4달 만에 방을 뺐다. 

이야기가 층간소음 에피소드로 잠깐 빠졌지만, 결론은 이 해프닝으로 나만의 보금자리를 얻게 됐다는 이야기다.


소심.. 아니 평화주의자(라고 해두자) 남편에게 1층 남자와의 트러블은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입자에 대한 트라우마까지 생겨 도저히 새로운 사람을 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국 우리는 1층을 손님이 왔을 때 묵는 용으로 쓰거나 혹은 남편의 사무실(?)로써 온라인 강의 수업이나 영상을 찍을 때, 그리고 아이들이 친구들과 시끄럽게 놀 때 쓰기로 결정하였다. 잘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돈보다 정신건강을 택했다.


2층 집에는 방이 3개가 있다. 

지금은 초등학생이 된 아이들 각각 방 하나씩 그리고 부부가 같이 쓰는 안방이다.

그리고 난 오랫동안 안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여름에는 더운 걸 못 참는 남편이 에어컨을 틀어대는 통에 추워서.

겨울에는 더운 걸 못 참는 남편이 보일러를 꺼놓는 통에 추워서.(뭔가 래퍼의 라임 맞추기 같다)

안방은 여름과 겨울에 추워서 들어갈 수도 잠을 잘 수도 없는 방이 되었다.(나에게만)

난 거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혼자 잠을 자기 시작했다. 

어깨가 배겼지만 익숙해지니 나쁘지 않았다. 잠을 잘 때만이라도 혼자 있으니 나름 안락함이 있었다.

그 후에는 여름과 겨울뿐만 아니라 1년 내내 거실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어느 날, 화장대를 쓰려고 안방에 들어간 날 보고 남편은 결정적인 한 마디를 날린다.


"음 당신, 내 방엔 무슨 일이야?"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 이 방은 니 방이구나 쩝' 난 어디로 가야 하지?

그때 마침 비어 있던 102호실이 생각났다.

오피스텔 느낌의 그 방은 간단한 가전제품이 이미 구비되어 있었다.

비어있던 곳이라 청소가 필요했지만 간단히 이불과 세면도구 정도만 챙기면 당장이라도

생활할 수 있었다.

지난 초 가을쯤인가 늦여름인가부터 102호실에 내려와 잠을 자기 시작했다. 

티브이 장 앞에 작은 매트리스 하나를 놓으니 좁은 거실이 꽉 찼다.

베란다 창을 살짝 열어 놓았다. 시원한 바람이 살살 들어온다.

워낙에 조용한 동네라 혼자 있으니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조명을 어둡게 하고 가만히 누우니 창밖으로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마당에 귀뚜라미가 이렇게 많았나?' 

마치 애초부터 혼자였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느껴보지 고요함. 다정한 적막감.

이 공간에서는 오로지 나만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하루 동안의 노고를 위로받는 기분. 

꽤 괜찮은 기분이다. 


그때부터 나의 하루는 102호실에서 시작해서 102호실로 끝났다.

아침 7시 그곳에서 눈을 뜨면 30분 정도 잠에 취해 밍기적거리다가 대충 겉옷을 걸치고 잠옷차림으로 102호실을 나온다.

마당을 지나면서 바깥 풍경도 살피고 오늘의 날씨도 체감해 본다.

팔 돌리기 같은 운동을 살짝씩 해주면서 계단을 오른다.

벌써 오늘 하루가 잘 풀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이들을 깨우고 빠르게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8시 반 아빠와 아이들이 우당탕탕 집을 나서면 난 집안을 대충 정리하고 다시 102호실로 간다.

요즘은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 동안 102호실에서 작업도 한다.(주방 식탁에서 할 때 보다 훨씬 쾌적하다는 걸 이제 알았다)

작업하기 전 티브이로 유튭 카페음악을 플레이하고 따듯한 커피 한잔을 마신다.

점심 먹기 전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본업인 전업주부에 복귀한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있기 때문에 오후시간은 내내 아이들 픽업을 한다.

두 아이의 각각의 학원 스케줄에 맞춰 데려다주고 중간에 시간이 남으면 간식을 챙겨주거나 학원 숙제를 봐주거나 해서 오후 내내 바쁘다.

그리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집을 정리한 후 아이들이 잘 준비를 마치고 빨리 방으로 들어가도록 독려한다.

아이들이 모두 방으로 들어가고 나면 9시가 좀 넘는다. 그제야 나의 퇴근시간이다.

전업주부 퇴근.

남편에게 퇴근을 고하고 102호실로 간다.


102호실의 문을 열면 난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이 혼자 사는 중년여성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엄마도 아닌 그냥 '나'로 돌아간다. 

이 세상에 혼자 있는 듯한 이 홀가분한 기분은 약간의 전율이 느껴질 정도다.


오늘도 피곤하고 바쁜 하루를 보낸 나에게 상을 주어야겠다.

그 상은 고독과 즐겨보는 유튭영상과 전자레인지에 막 돌린 어깨에 올려진 뜨거운 찜질 수건이다.


수전은 남편의 과도한(?) 관심으로 19호실의 존재를 들켜 결국 죽음을 맞이했지만.

다행히 나는 102호실에서 꽤 오래 목숨을 연명할 것 같다.

내 남편은 내가 102호실에서 지내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편의 헛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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