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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프펜 Jan 06. 2024

'F'도 노력하면 'T'를 배울 수 있다.

나는 'F'다. 

요즘 유행하는 MBTI검사에서 말하는 성격유형 중 '감정형'이라는 뜻이다.

내 남편은 'T'고 '사고형'이다.

나는 F 중에서도 극 F, 남편은  T 중에서 극 T 성향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의 성격은 서로 상극이다.


가끔 남편의 출세를 질투하는 글을 쓴다.

나도 남편도 사람이고 나도 내 분야에서 열심히 했고 남편도 그랬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흘러 이렇게 우리의 신세가 하늘과 땅 차이가 된 것은 분명 나의 '결혼'과 '출산'이 원인이다!라는 강력한 주장에는 변함이 없지만,

MBTI가 유행의 중심에 선 요즘, 우리가 이렇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서로의 극명한 성격 차이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오늘은 긴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난 다음날이다. 

3 일 내내 아이들과 집안일에 시달리다가 오늘 아침에야 겨우 혼자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혼자는 아니다. 요즘 남편은 본인 방(실은 안방임)에서 풀타임 온라인 수업을 한다.

9 시에 수업이 시작하기 때문에 그전까지 안방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꺼내놓아야 한다.

연휴 내내 더럽게 있던 난 머리가 감고 싶어서 안방과 가깝게 붙어있는 욕실에 서둘러 들어갔다.

남편의 수업에 방해가 될까 싶어 수업 시작 전에 어수한 것을 끝내려고 했다.

미리 준비한 속옷을 대충 걸치고 거실로 급히 튀어나왔는데 이미 수업이 시작된 후였다.

그런데 당혹스럽게도 안방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아! 옷을 마저 입으려면 거실 문을 지나가야 하는데 어쩌지?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남편이 문을 닫아주길 기다렸다.

방문 손잡이가 안쪽으로 되어있는 문을 닫으러 갔다가는 자칫 화면의 수십 명의 학생들에게 못 볼 꼴을 보이는 사태가 벌어질 참이었다.

문자도 보내보고 헛기침도 해보았지만 전혀 소용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남편한테 전화를 걸었다. 당황한 남편이 전화를 받고 그제야 문을 닫아주었다.


특별할 것 없는 나의 일상이지만 그래도 한 주의 시작을 산뜻한 마음으로 열고 싶었다. 

그러나 난 이 작은 사건 하나로 마음이 상하는 감정형 'F'이다.

문이 열려 있어서, 문이 닫힐 때까지 시간이 걸려서, 문을 닫게 하기 위해 번거로운 일들이 짜증이 나 마음이 상한 것이 아니다.

내가 아침마다 뻔히 남편의 수업에 방해되지 않으려고 서둘러 씻고 안방에 물건들을 미리 꺼내 놓는 걸 알면서 수업 시작 전 방문을 활짝 열어 놓은 것은 수업 내내 거실에서 소리 죽여 지내야 할 나와 조용히 공부해야 할 학생들을 배려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 비슷한(이보다 훨씬 심각한) 일로 내 심장을 쪼그라들게 만든 사건이 떠올라서 더욱 화가 났다.


반면에 극 'T'인 남편은 어떤 '사건'에만 집중할 뿐, 그 사건으로 인해 생기는 자신의 감정변화에 대해서는 무던하다.

그 점이 사실 난 너무 부럽다.

남편이 내 상황이었다면, 문이 다시 닫힌 순간부터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복귀가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가 됐던 부분이 해결됐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난 다르다.

문제가 해결되어도 나의 '감정'이 남는다. 나를 불쾌하게 만든 그 감정이 사라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심지어는 안 좋았던 과거 비슷한 사건들에서 느꼈던 감정들까지 스멀스멀 피어올라 나의 감정은 격한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것이다.

이번에도 나의 오전시간은 이런 감정들 때문에 계획했던 작업들을 제대로 시작할 수 없었다.

감정에 휘둘리는 성격은 사실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매우! 효율적이지 못하다.


보통 성격은 어릴 때 정해지는 것이므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난 내 감정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살아온 셈이다.(아 얼마나 많은 감정과 에너지를 효율적이지 못한 곳에 소모하며 살았는가!)


몇 년 전부터 이 검사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감정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그 반대는 사고형이라는 것도, 그리고 나와 정 반대의 생각과 행동패턴 때문에 늘 트러블이 끊이지 않았던 남편이 사고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고형+현실형인 남편은 남편은 쓸데없는 곳에 뭔가를 낭비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그것은 돈이 될 수도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역시 감정도 마찬가지였다.(아니다 사실 낭비할 감정 자체가 아예 없는지도 모르겠다)


난 이 MBTI성격유형이라는 것이 꽤 흥미로워서 각각의 유형의 특징을 찾아보고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좋다고 느꼈던 것은 주관적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성격적 특징들을 객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나만 왜 이럴까?라는 생각이 가끔 억울하기도 하였는데, 사실은 나와 같은 성격적 특징은  특정 MBTI유형 때문인 것이고 거기에 포함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하니, 마치 나의 성격적 단점(?)들이 내 탓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내가 나쁜 게 아니야, 나의 MBTI 때문이야)


어쨌든 나는 남편의 성격이 썩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자신의 일을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꿋꿋이 실행에 옮기는 성격은 본받을만하다.

글 초반에 꺼낸 '의심'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남편의 'T'성향의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인간이다.

성공하거나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가진 대부분은 이 'T'를 가지고 있다.

내가 결혼과 육아를 하지 않았어도 내가 가진 'F'성향으로 인해 결국 내 일을 잘 해내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다.


요즘의 나는 평소에 감정을 억제하려고 노력 중이다. 

성공에 대한 집착(?)은 나도 남편에게 지지 않을 만큼 있다. 성공을 하기 위해 T가 필요하다면 난 얼마든지 내 감정을 누룰 강한 의지(만)가 있다.

원래부터 가지고 태어난 성격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감정의 파도가 때문에 내가 하려던 일을 그르치려 할 때마다 난 생각한다. '이럴 때 티들은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아 그저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할 뿐이야.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어!'

나는 T가 될 수는 없지만 T를 흉내 낼 수는 있다.

감정은 똑같이 요동쳐도 이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나에게 이득인지 알고 난 후부터는 전보다 하고자 하는 일에 금방 몰입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뭔가 객관화된 것 같은 나의 감정들을 해소하는 것이 확실히 전보다 수월하게 느껴졌다.


평생이 걸려도 남편만큼 효율적인 인간은 될 수 없겠지만, 난 오늘도 'T'를 배우며 작은 성공을 갈망해 본다.


<이 상황에서 일이 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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