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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들의 수난

식물무지론자의 실수

by Grace Mar 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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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운명처럼 훅 하고 내 인생으로 다가온 그날은 참으로 우연이라고 하기엔 정말 우연 중의 우연이었다. 여느 때와 다르게 나른한 주말 게으른 일상 속에 겨우 의무적으로 매일매일 가야 하는 헬스장으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왔다. 보통 러닝머신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땐 티브이를 켜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날은 뉴스를 보게 되고 요즘은 뉴스 볼 맘이 전혀 들지 않지만 아예 보지 않은 것은 출연자들 나와서 히죽거리며 웃는 그런 가벼운 오락 프로는 선호하지 않는다. 그날따라 '나혼산'을 그냥 보게 되었다. 마침 나온 그 식물장 바로 그게 시작이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빛과 같은 속도로 식물장을 검색해 봤지만 스스로 만들었다는 식물장처럼 적은 비용으로 기술을 이용해 그녀처럼 식물을 재배할 기술은 없는터라 뭔가 손을 크게 안 들이고 자동적으로 식물이 크게 하는 장치는 없을까 하다가 바로 수년 전 그냥 우연히 스치고 지나갔던 그 틔운 미니를 구입했다. 며칠 걸려 배송받자마자 바로 동봉된 씨앗을 파종한 후 하루하루 다르게 성장해 가는 식물들을 보며 차갑게 굳어가는 내 마음도 치유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하나 가지고는 왠지 부족하 느낌이 들었고 틔운 미니를 여러 대 구입해 재배하는 사람들 사진도 보았다. 시기적절하게 카페를 통해 세일소식을 접하고 남편 눈치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식물에 애정이 있는지를 입증해 가며 추가로 한대 더 구입했다. 마음 같아서는 백만 원 육박하는 오브제를 구입하고 싶지만 오브제를 구입하면 정말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건 가격도 그렇거니와 성인 혼자 들기 어려울 정도로 냉장고급 무게인지라 정말 평생 영원히 그것에 애착을 가지고 많은 식물을 재배한다는 목적을 가진다면 모를까.

게다가 중고나라나 당근에 올라가 있는 걸 보고 언젠가는 저것도 사람들의 열기가 식는구나 하는 생각과 나 또한 누구보다도 싫증을 잘 내는 사람인데 저걸 영원히 끌어안고 그 가격만큼 잘 활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 애써 불타오르는 욕구를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고나라나 당근에서 오브제를 종종 검색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늘 집을 그 식물등이 밝혀주는 느낌이 너무도 좋았다. 첫 번째 구입한 틔운 미니에는 함께 동봉된 로메인상추를 심었고 한 곳엔 로망이었던 방울토마토 씨앗을 심었다. 로마인들이 즐겨 먹었다고 해서 로메인이라고 불리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오호라, 고깃집에서 쌈채소 중 가장 연하고 얇은 잎으로 된 상추가 로메인이었구나. 매일매일 애완 및 반려 동물을 키우는 심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했다. 이제 그렇다면 새로운 틔운 미니 2에는 무엇을 심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열매가 익어 따먹을 로망에 젖어있던 나는 전체를 방울토마토 씨앗을 뿌릴까 하다가 이것저것 모험해보고 싶은 욕망이 불쑥 생겼다.


순간의 오판은 일을 그르치기에 충분하다. 인간이기에 늘 이 길일까 저길 일까 하다가 좋은 결과를 나오면 안도하지만 잘못된 순간의 판단으로 일을 그르치면 두고두고 죄스런 느낌을 가진다. 실험정신이 너무 과도했을까 나도 모르게 다이소에서 산 잡채소 씨앗을 그 작은 구멍하나하나에 5알씩 투하했다. 그전에 잡채소 씨앗을 흙으로 이루어진 화분에 파종을 했건만 랜덤으로 어떤 건 미니깻잎이 나고 나머지 대부분은 오래전에 먹었던 이제 마트 야채칸에서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새싹채소 종자로 보이는 게 나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 크지 않고 새싹크기로 크다가 시들어버리곤 했다. 그것을 그렇게 새로운 미티 2에 파종하고 일주일을 기다리자 새싹채소 모양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야 정신이 버쩍 들기 시작했다. 아니 이렇게 비싼 기계에 무슨 짓을 한 거지. 당장 새싹 채소들을 뽑아내고 동봉된 비타민 채소씨앗을 집중 투하했다. 정말 비타민이라는 채소가 있는 줄도 모르는 난 완전 식물 무지렁이인셈이다. 일주일이 지나자 떡잎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나의 혼돈이 시작되었다. 올라온 떡잎은 내가 전에 뽑아버렸던 채소떡잎과 같은 모양이었다. 바로 옆 흙에서 자란 새싹채소와 비교를 해봐도 분명 같은 모양이었다. 몇 날 며칠을 매의 눈으로 확대하고 검색해 보아도 내 눈으론 그게 새싹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파종한 비타민 씨앗을 어디로 갔을까. 의문을 간직한 채 결국 틔운 미니로 식물을 재배하고 있는 카페에 글을 올렸다. 그리고 글을 올린 사실을 잊어버리고 얼마 후 그냥 내 생각이 맞을 거야 완전한 확신을 한채 여지없이 그 새싹들을 다 뽑아버렸다. 그리고 전에 사둔 바질 씨앗을 5개씩 투하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헬스장으로 향했다.


한참 운동을 하는데 글 알람이 울렸다. 틔운 카페에 올린 글에 대한 답장으로 몇몇이 어린 비타민 새싹을 보여주며 처음에는 떡잎부터 나와서 다 그런 모양이다. 하는데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정신이 버쩍 들었다. 애써 일주일을 키운 비타민을 무지막지하게 뽑아버리고 다시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낭비하고 아까운 비타민씨앗을 날리다니 이 성급한 자신을 원망했다. 마치 나는 오래된 신화나 전설에서 이무기 피로 얼룩진 빨간 깃발을 보고 왕이 전쟁에서 패한 줄 알고 자결했다거나, 빨간 깃발이면 바로 옆에 있는 볼모를 죽이라는 잘못된 전령으로 인해 오판을 한 어리석은 신화 속 인물과 같았다. 이제 후회해 봤자 뭐 하랴 처음 일주일은 쌈채소, 두 번 일주일 생존한 비타민은 뿌리째 뽑혀버리고 새로운 바질이 이번엔 세 번째로 그 방을 차지했다. 주인이 몇 번이나 바뀌는 방인가. 단 하나의 식물이 처음부터 자리했으면 영양분을 많이 받는 건데 3번째 뽑히면서 그 구멍에서 같이 뽑혀 나오는 마법의 구멍의 흙 부스러기들이 너무나 아까웠다. 디행히 뽑아버린 비타민은 버린 거 아니라 한 달 걸려 배송받은 중국산 수경재배 박스에 이식은 했다. 중국산 수경재배통도 왠지 속은 것 같은 것이 이케아 수납박스 같은데 물을 담고 솜을 넣은 홀 속에 씨앗을 넣은 거라 그게 얼마나 클지 장담할 수 없다. 에먼 비타민은 잘 살던 집을 쫓겨나버린 것이다.


그동안은 이렇게 식물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애지중지 키우며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지금의 이런 모습은 과거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이건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지만 좋은 변화임을 틀림없다. 이제 틔운 미니 2에는 바질 5 구멍, 토마토 3 구멍, 비타민인가 아닌가 하는 게 2 구멍이 존재한다. 두구의 새싹도 지금 보기엔 쌈채소로 보이는데 커보면 진짜 비타민인지 아닌지가 나올 것이다. 앞으로는 처음부터 진중히 파종을 할 것이며 차분한 마음으로 매일매일 새싹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언젠가 다가올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겠다.    

과연 이게 비타민인가 쌈채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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