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4일(금)에 강원대 환경법센터와 (재)지구와사람의 공동학술대회가 있었습니다. 전체 주제는 <<한국 사회의 생태적 지속가능성 보장과 헌법 체제: 기후생태헌법의 제안>>이었는데요. 저는 <생태대를 향한 지구 입헌주의 서론: 지구법학 관점에서 서구의 근대 입헌주의 비판>이라는 긴 제목으로 발표했습니다. 제목이 너무 거창해서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주제입니다. 그래도 저로서는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주제입니다. 일단 운을 떼는 게 필요했거든요.
먼저 개념 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번 글에서 간략하게 개념 정리를 해보려 합니다. 생태대는 토마스 베리라는 신부이자 생태 철학자의 개념인데요. 토마스 베리는 생태대(Ecozoic)로 가는 것이 지구에 사는 모두의 책임이며 유일하게 지속 가능한 미래로 가는 경로라고 주장합니다. 생태대는 ‘생태’(eco)와 ‘생명’(zoic)의 합성어로서 인간이 지구공동체의 참여 구성원으로 지구에 존재하는 지질시대입니다. 인류세(Anthropocene) 개념을 통해 지질시대를 문제 삼는 것은 인류가 지구에 미친 영향을 성찰하기 위함입니다.
헌법의 등장은 18세기 정도이니 시간 측면에서 지질시대에 견줄 수 없죠. 인류가 지구 생태계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시기와 서구의 근대 입헌주의는 견줄 만합니다. 지구법학이 지구 생태계에 위기에 조응하여 기존의 법학 또는 법체계를 넘어서는 시도라고 한다면, 서구의 근대 입헌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 지질시대를 넘어 생태대를 지향하는 일은 헌법 체제 차원에서는 서구 근대 입헌주의 시대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현행 헌법에 생태대를 지향하는 내용의 국가 목표, 헌법 원칙, 기본적 권리, 거버넌스 조직의 재편 등을 담는 일이 현 상황을 변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새로운 헌법 조항이 제도적으로 구현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기존의 다른 헌법 조항과 어떤 관계에 놓일지까지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후 위기 또는 지구 생태 위기 관련하여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존재합니다. 비인간 존재에 대비하는 의미에서 인간중심주의 비판이 필요하지만, 인간중심주의의 내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디모스(T. J. Demos)는 생태 위기의 근원은 종(species)으로서 인간보다는 기업의 산업적 활동이 대부분이라면서, 종으로 일괄하여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기업의 책임과 의무를 은폐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서구 근대 입헌주의가 인류사에서 이바지한 공이 있지만, 빛 못지않게 그림자가 존재합니다. 그림자에 가려진 어둠 속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근대’라는 시간적 한계와 ‘서구’라는 공간적 한계를 드러내고, 시간의 축적과 변화 그리고 비서구를 넘어 자연으로 공간을 확장함으로써, 어슴푸레하게라도 어둠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드러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구 생태계의 파괴에 따라 종말의 위험에 다다른 신생대 또는 인류세의 끝자락에서 생태대로 이행하는 위대한 과업에 걸맞은 헌법 체제의 가능성을 찾아보는 거죠. 그 과정에서 지렛대 또는 연결 면으로 삼을 수 있는 헌법 원칙을 찾아보려 합니다.
일본으로 오면서 두 권의 책을 들고 왔습니다. 한 권은 Marco Goldoni와 Christopher McCorkindale이 엮은 『한나 아렌트, 정치와 법』(홍원표 옮김, 신서원, 2021)입니다. 발제문에 담지 못했지만, 발표할 때 꼭 언급하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요. 시간에 쫓겨 말하지 못했습니다. 옮긴이의 해제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인 학살범인 아이히만 재판의 쟁점인데요.
피고 아이히만의 변호인은 세 가지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첫째, 아이히만이 소급법에 따라 재판을 받았으며 승자의 법정에 섰다는 것입니다. 법정은 “예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범죄가 갑자기 발생하면, 정의 자체는 새로운 법에 따라 재판할 것을 요구하게 돼”므로, 아이히만 처벌의 근거인 ‘나치 및 협력자에 대한 처벌법’은 형식적으로만 소급법 금지 원칙을 위반할 뿐 실질적으로 위반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둘째 반론은 예루살렘 법정이 아이히만 재판을 수행할 자격, 즉 재판 관할권을 갖추고 있는가인데요. 법정은 “유대인은 국가의 성립 이후 자기 민족에 자행한 범죄를 재판할 권한을 가지며, … 범죄가 자행된 시점에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형식주의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셋째 반론은 아이히만의 범죄가 어떤 유형인가에 대한 문제인데요. 피의자인 아이히만은 자신이 국가의 행위 및 상관의 명령에 따른 행위를 했기 때문에 일관되게 무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구 생태의 위기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생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인류 전체의 책임을 배분하는 정의론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탄소배출 관련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책임을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이른바 누적적 배출 책임입니다. 이러한 책임은 국민국가 단위를 넘어 지구 차원에서 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 기업 그리고 개인 차원에 이르는 복합적인 책임 관계를 규명해야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죠. 그리고 전통적인 형사 책임으로서 형벌과 민사책임으로서 금전 배상만으로 해소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정의에 입각한 다차원적인 법적 조치를 고민해야 합니다.
다른 한 권의 책은 이상헌의 『생태주의』(책세상, 2022)입니다. 집을 나서기 직전에 찾아서 가방에 넣었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초판은 2011년에 출간되었는데요. 제게는 정말 유용한 책이었습니다. 일본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갔는데요. 이제야 읽은 게 후회되기도 했지만, 모든 건 때가 있는 법이니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영국의 정치학자 앤드루 돕슨(Andrew Dobson)은 인간 사회와 자연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답변하는 다양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생태주의’(Ecologism)라고 표현했습니다. 지구법학은 법학 관점에서 인간 사회와 자연의 근본적인 관계를 탐구하는 생태주의의 한 분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성[근대성]은 과학과 기술의 과학적 발전으로 인한 현대적 주체의 발견, 그리고 특히 18세기 유럽의 현대적인 [근대적인] 사회 조직 방식, 경제적 삶의 양식, 정치적 정당화 과정에서 발생한 급격한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헌법이 바탕을 둔 것은 서구의 근대적인 입헌민주주의죠. 그 전제는 사회, 경제적 ‘진보’를 위해 이용되는 자원으로 자연을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남성/여성, 문화/자연, 이성/감성 등을 나누고, 앞의 것이 뒤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태주의 이데올로기가 과거의 이데올로기들과 대결 구도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생태주의는 기존의 이데올로기로서 잘 포착되지 않는 ‘예상치 못한 복잡한’ 문제들과 끊임없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생태주의는 기존 패러다임이 한계에 봉착했을 때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내라는 근본적인 요구, 즉 ‘성찰적 계기’를 그 안에 품고 있습니다. 지구법학 관점에서 지구입헌주의도 그렇습니다. 구체적인 비판적 성찰 내용은 다음 기회에 나누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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