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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수 Oct 27. 2022

퇴근하는 길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어두운 터널과 무성한 풀로 덮인 벽을 지나자 갑작스레 붕 뜬 듯 시야가 넓어졌다. 저 멀리에는 난데없이 아파트 단지 몇 채가 솟아 있었는데, 오후의 따뜻한 햇빛이 각진 모서리를 부드럽게 만지고 있었다. 아파트 밑동은 초목으로 무성했고, 전철은 아파트를 가운데 두고 크게 원을 그리듯, 빙 둘러갔다. 아파트가 아주 천천히, 앞면에서 옆면으로 넘어가며 우성이라는 글씨를 보여주었다. 덜컹, 선로가 바뀌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열차 안이 어두워지면서 주위도 조용해졌다. 햇빛이 눈물 자국이 남은 더러운 유리창을, 그리고 유리창이 객실 안을 차례로 밝혀주며 허공에 뜬 먼지들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침침해진 객실 안은 상관없다는 듯이 각자의 핸드폰을 붙잡고 제 각기로 다르게 심각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어두워진 얼굴 위로 빛이 잠시 들었다 다시 물러갔다. 자리가 비어 있었음에도 몇몇 사람들은 가방을 메고 서 있었는데, 그 뒤로 보이는 다음 객차는 빙 둘러가는 선로 모양 그대로 굽어져 있었다.


그다음 객차도 그다음의 다음 객차도 보잘것없어 난 금방 지루해졌고, 지루해진 나는 팔짱을 낀 상태로 졸기 시작했다.


열차는 어두워질 때와 마찬가지로 예고 없이 환해졌고, 사람들은 새삼스레 놀랐다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몇몇은 창문 밖을 보더니 주섬주섬 짐을 챙겼지만 대부분은 다시 고개를 떨구고 심각해졌다. 열차가 차츰 느려지면서 주변 풍경이 가까워지고, 선명해지고, 지저분해졌다. 지저분한 풍경에는 제 멋대로 생긴 건물들과, 그 건물을 배경으로 춤추는 전선과, 그 밑을 내달리는 자동차 같은 것이 있었다. 지저분한 배경을 뒤로 달리는 자동차에는 어쩐지 극적인 데가 있었다. 그러나 그 풍경도 곧 어두워지고 등장인물들은 어두운 커튼 뒤로 숨어 저들끼리 말을 주고받고 웃어댔다. 드문드문 박수갈채가 들려오 는 듯했다.


열차는 결국 완전히 멈췄고, 경보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밀려들어와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열차가 출발하자 소란은 금세 사그라들어 객실 안은 다시 적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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