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중소기획사가 선택한 '가성비' 높은 전략
K팝 등의 콘텐츠 산업은 한국 산업에서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과거 '딴따라'라고 예술인들을 얕잡아 보는 풍토에서 이제는 당당하게 전 세계 음악시장을 이끌어갈 수 있는 한 장르가 됐다. 이러한 변화는 2010년대 데뷔한 가수들의 활약이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동안 척박한 한국 대중가요를 일궈왔던 수많은 가수가 있었기에 실현될 수 있었다.
어린 나이 때부터 소속사에서 캐스팅해서 육성하는 시스템은 여전히 K팝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선 논란거리다. 그럼에도 자연발화한 팝스타와 다른 K팝의 매력을 지니게 되는 것 또한 육성 시스템 덕분이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향후 K팝이 나아가는 방향에서 고민할 부분인 동시에 숙제인 것 또한 사실이다.
K팝 시스템이 무르익어 갈수록 대형 기획사 출신 연습생들이 중소 기획사에서 데뷔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도 한 기업에 있어서 콘텐츠를 생성하는 데는 많은 시간적, 경제적인 비용이 소모된다. 자연스럽게 대형 기획사 연습생들은 실력과 별개로 데뷔 그룹 콘셉트와 맞지 않거나 데뷔 시기가 밀려 일정 수준 이상의 나이가 차게 되면 데뷔 기회를 잡기 위해 중소 기획사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다.
지난 7월 데뷔한 키스오브라이프(KISS OF LIFE )는 현재 K팝 시장을 엿볼 수 있는 그룹이다. 쥴리, 나띠, 벨, 하늘로 구성된 이 그룹은 신생 기획사인 S2엔터테인먼트에서 데뷔했다. JYP엔터테인먼트의 공동창립자이자 큐브엔터테인먼트의 설립자인 홍승성 대표가 수장으로 있는 기획사다. 신생 기획사인 S2엔터테인먼트는 신인 걸그룹 데뷔를 준비하면서 자체 오디션 프로그램을 기획하지 않고, 연습생 경험이 있는 가수들을 한 데 모았다.
쥴리는 팀에 합류하기 전 더블랙레이블과 스윙엔터테인먼트에서 연습생으로 생활했다. 나띠는 2013년 JYP 글로벌 오디션에 합격해 11살 때부터 JYP엔터테인먼트 연습생으로 실력을 키웠다. 이후 2015년 'SIXTEEN', 2017년 '아이돌학교'에 참가하고서 스톤뮤직엔터테인먼트로 이적했다. 벨은 AURA 엔터테인먼트에서 데뷔 준비 중에 회사가 S2엔터테인먼트로 통합됐으며, 하늘은 S2엔터테인먼트에세 데뷔를 준비했다.
키스오브라이프는 '실력파 신인'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웠지만 처음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최근 K팝 신인 그룹들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키스오브라이프도 처음에는 다른 그룹과 전략적으로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해외 팬들의 리액션 영상들이 나오고, 꾸준한 음악 방송 출연 등을 통해 점차 그룹 이름을 알려갔다.
신인 여성 그룹들은 크게 '청순' 혹은 '걸크러시'라는 선택지가 주어진다. 청순하게 시작해 걸크러시로 끝맺음을하든, 걸크러시로 시작해 청순으로 반전 매력을 보여주든 그 안에서 전략을 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키스오브라이프는 2세대 아이돌을 떠올리는 듯한 음악과 패션에 트렌디한 요소를 섞어 접점을 찾는 방식을 선택하며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이러한 시도가 낯설지는 않다. 단지 그동안 이전 세대의 음악을 재해석하는 음악들은 '복고'라는 느낌이 강했다. 반면 키스오브라이프는 그리 멀지 않은 세대의 음악, 패션을 끌어왔다. 뉴진스 또한 지난해 데뷔하면서 Y2K 느낌이 강한 음악, 스타일을 내세운 것과 비슷하게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키스오브라이프는 Y2K 느낌을 중소 기획사다운 '가성비' 높은 전략으로 시도하면서 다른 길을 만들었다.
키스오브라이프의 데뷔 앨범 'KISS OF LIFE'에는 '쉿 (Shhh)' '안녕,네버랜드' 'Sugarcoat (NATTY Solo)' 'Countdown (BELLE Solo)' 'Kitty Cat (JULIE Solo)' 'Play Love Games (HANEUL Solo)' 등 총 6곡이 수록됐다. 이례적으로 데뷔 앨범에 단체곡 2곡과 각 멤버들의 솔로곡들이 담겼다. 데뷔 후 일정 팬덤이 갖춰진 뒤 솔로곡이나 솔로 활동에 나서는 기존 그룹들과 다른 행보였다.
타이틀곡 '쉿 (Shhh)'을 비롯한 '안녕,네버랜드'는 단체곡으로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신인 작곡팀이 작업해 새로움을 더했다. '쉿 (Shhh)'은 힙합, 댄스 장르를 넘나드는 곡으로, 자칫 여러 곡을 뒤섞어 놓은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지만 힘 조절을 잘한 곡이다. 쥴리, 나띠의 랩파트와 벨, 하늘의 보컬 파트가 고르게 분포돼 있어 그룹과 더불어 멤버들 각자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안녕,네버랜드'는 기승전결이 뚜렷한 곡으로 타이틀곡과 솔로곡 사이에서 좋은 중간 다리 역할을 해준다. 이 외에도 'Sugarcoat'는 특히 키스오브라이프에서 떠올릴 수 있는 Y2K 느낌을 제대로 살린 트랙이다. 2000년대 여자 솔로 가수를 대표하는 이효리를 연상하게 하는 나띠의 패션과 퍼포먼스는 키스오브라이프가 어떻게 '실력파 아이돌'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알게 해준다. 또한 'Countdown' 'Kitty Cat' 'Play Love Games'는 벨, 쥴리, 하늘의 솔로가수로서의 음악적인 재능을 보여준다.
키스오브라이프의 음악, 패션, 퍼포먼스에 이르는 콘셉트는 결국 뮤직비디오로 귀결된다. 이 그룹은 데뷔와 동시에 타이틀곡은 물론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을 영상 형태인 뮤직비디오로 구현했다. 영상 콘텐츠를 단순히 물량으로 밀어붙여 승부를 보는 것 같지만, 뮤직비디오 제작에 있어서도 다른 신인 그룹과 다른 키스오브라이프만의 매력을 어필했다.
이들의 뮤직비디오는 2000년대 유행한 스토리 형식을 띈다. 나띠의 솔로곡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타이틀곡 '쉿 (Shhh)'으로 마무리된다. 최근 유행 중이 K팝 뮤직비디오들이 한정된 플레이 타임 안에 최대한 전 세계 팬들을 겨냥해 제작하면서 빠른 전환, 다양한 세트의 활용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키스오브라이프는 6편에 이르는 뮤직비디오가 한 편의 드라마처럼 맞물리는 스토리에 집중했다.
키스오브라이프는 그동안 K팝 그룹이 채택했던 뮤직비디오 홍보 방식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각자 아픔을 지닌 채 서로 다른 삶을 살았던 멤버들이 우연히 모이게 되면서 그룹을 이뤄 오디션 무대에 오른다는 이야기다. 진부해 보일 수도 있는 줄거리지만, 200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곡과 영상들이 그러한 느낌들을 지운다. 마지막에 모든 멤버들이 모여 무대에 오르는 모습은 시청자에게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한다.
그렇다고 키스오브라이프의 뮤직비디오가 모두에게 환영받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한 대로 드라마와 같은 진행이 최근 뮤직비디오에서 보이지 않는 형식인 만큼 컷 길이가 긴 편이다. 중간에 환기가 되는 안무 장면 등이 없어 빠른 장면 전환에 익숙한 K팝 팬들이 자칫 지루하게 느낄 수 있다. 자연스럽게 키스오브라이프로 유입되는 이들에겐 진입 장벽이 된다.
키스오브라이프는 대형 기획사들이 굳건히 자리 잡은 현재 K팝 시장에서 중소 기획사들이 어떻게 전략을 구사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했다. 그동안 기대 이상으로 성장한 대형 기획사 출신의 연습생들을 모으고, 당시에는 비난받았을지라도 K팝의 자양분이 된 음악을 다시 구현했고, 스토리 라인이 살아있는 뮤직비디오로 앨범 수록곡들을 하나로 묶었다.
키스오브라이프는 일단 국내외 팬들에게 데뷔와 동시에 존재감을 알리는 데 성공했다. 점차 K팝 기획사들의 물량 공세가 그룹의 성공을 결정하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키스오브라이프의 다음 활동은 어떻게 이뤄질지 관심이 쏠린다. 그룹 이름의 한국 의미인 '인공호흡'처럼 키스오브라이프는 K팝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두 번째 앨범 혹은 신곡이 이들의 앞날을 결정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