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리지 않은 양식을 빌려 입은 그림
부패한 정치인, 부도덕한 상류층. 이들은 피곤할 정도로 반복적으로 뉴스에 오르내리며 불쾌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이런 부류들은 비단 우리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18세기 중반 영국과 프랑스 시민들도 정치인과 상류층에 대한 환멸과 혐오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왕정을 신뢰하지 않았고, 사치스러운 귀족과 상류 부르주아를 떨쳐버려야 할 구체제의 상징으로 느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귀족 취향의 장식적인 예술인 로코코 양식은 설자리를 잃어갔다. 한껏 멋을 낸 상류층의 연애를 아름다운 한때로 묘사하는 목가적인 그림들은 윤리적 기준이 높아진 중산층 시민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새로운 감수성을 대변할 예술이 필요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화가들은 변화를 새로운 예술 대한 욕망은 동일했으나 영국과 프랑스에서 생겨난 예술은 각기 달랐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입헌군주제를 시작된 영국과 1789년 대혁명을 목전에 둔 프랑스는 정치적 상황이 상이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 영국과 프랑스 회화가 어떻게 비슷하지만 다른 길을 갔는지 살펴보자.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 1764) 국제적으로 알려진 최초의 영국인 화가였다. 그는 상류층 사람들이 바다 건너에 있는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수입해 오는 것을 보아왔다. 매우 개성이 강하고 독립적이었던 호가스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보다 새로운 구매자를 찾아 나섰다. 이름난 부자는 아니지만 일 년에 판화 몇 장 정도는 살 수 있는 중산층이 그가 찾아낸 주요 고객이었다. 그는 주로 상류층의 부도덕함을 풍자하는 판화 연작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는데 총 8장으로 구성된 <탕아의 편력 A Rake's Progress>[그림 1]도 그중 하나이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이다. 첫 번째 그림에서 <젊은 상속자>[그림 2]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재단사를 불러 비싼 옷을 맞추고, 집안 인테리어를 하고 있다. 마침 그의 약혼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찾아왔는데, 그는 약간의 돈을 쥐어주며 파혼을 한다. 그러는 사이 그의 뒤에 앉아 있는 남자는 몰래 돈을 빼돌리고 있다.
이렇게 처음부터 위태로워 보이는 도련님의 인생은 파국으로 흐른다. 그는 상류층의 파티를 즐기고, 화류계 여인들과 어울리다 [그림 3] 파산하여 결국 정신병원[그림 4]에 갇히게 된다. 족쇄를 차고 쓰러져있는 그를 찾아와 슬퍼하는 사람은 그가 버렸던 약혼녀뿐이다.
이 마지막 장면의 배경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탕아 뒤로 보이는 첫 번째 독방에는 십자가 아래에서 성자처럼 기도하는 종교적 미치광이가 있고, 두 번째 독방에는 왕관을 쓰고 있는 정치적 미치광이가 있다. 사치한 상류층뿐만 아니라 무능한 교회와 왕도 그의 비판 대상이었던 것이다.
호가스의 <탕아의 편력>은 회화를 몰락해 가는 한 인간의 비극적 이야기로 만들어 버린 작품이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는 비극적 정서가 없다. 탕아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조차 주인공을 구경하러 온 여인들과 광대가 등장하여 진지함을 날려버린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간에 대한 안쓰러움은 호가스의 몫이 아니었다. 방탕한 상류층에 대한 풍자와 사치에 대한 경고가 그의 주제였고, 그의 주 고객이었던 중산층의 취향에 부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그림들은 매우 기교가 뛰어남에도 심미적 격조가 느껴지지 않는다.
프랑스의 중산층들도 호가스의 고객들처럼 상류층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명예혁명에 성공한 뒤 상류층에 대한 풍자와 조롱을 노골적으로 일삼는 영국인들과 달리 프랑스 중산층은 새로운 도덕적 모델을 원했다. 장 바티스트 그뢰즈(Jean-Baptiste Greuze 1725–1805)는 그들의 요구를 대변하는 그림을 몇 해에 걸쳐 살롱에 출품해 인기를 끌었다.
1763년에 살롱에 출품한 <효심>[그림 5]은 병에 걸린 아버지와 가족들을 그린 그림으로 주제가 매우 명확하다. 누워있는 아버지를 돌보기 위에 온 가족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있다. 사위는 음식을 떠먹여 주고 큰 딸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책을 읽어드린다. 작은 딸은 아버지가 좀더 편안하도록 베개의 위치를 바로잡고, 어린 아들들은 물을 떠 오거나 흘러내린 담요를 바로잡는다. 어린 손자들도 곁을 맴돌며 할아버지를 돌본다. 그의 검소한 아내는 바느질 일감을 손에 놓지 않은 채 남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개조차 주인을 바라본다. 이렇게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나가 된 검소하고 사랑스러운 가족. 이것이 그뢰즈의 주제였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인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는 이 작품을 향해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그뢰즈는 진정 나의 사람입니다. …… 우선 장르가 제 마음에 듭니다. 도덕적인 회화입니다. …… 마침내 붓이 극시劇詩와 어울려 우리를 감동시키고, 교육하고, 교정하고, 훌륭한 성품을 만들게 된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까? 친구 그뢰즈여! 용기를 내십시오. 회화에서 언제나 이같이 도덕을 그리십시오! -드니 드디로, <살롱> - 1763년. 지만지 고전선집.
디드로의 말처럼 그뢰즈의 그림은 감동을 자아내는 매우 교훈적인 그림이다. 진실하고 소박한 이 가족의 모습은 계몽주의자들이 제시한 미덕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병든 아버지만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표정은 사랑과 연민을 담고 있지만 내적 고뇌와 깊이가 없다. 이들에게선 어떤 개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그림이 디드로를 비롯한 당시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 주었던 것은 사회적· 정치적 요구가 심미적 판단을 멈출 만큼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귀족들의 신분적 고귀함을 뛰어넘을 도덕적 고귀함이 필요했다.
호가스와 그뢰즈의 그림은 현실참여적인 그림이었다. 그들은 계몽철학자나 정치운동가처럼 사회를 비판하고 새로운 인간형을 제시한다. 이들이 자처한 과제는 매우 무거운 것이었다. 그런데 호가스는 위트 있는 풍자로 비판이라는 과제를 가볍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뢰즈는 진지한 얼굴을 한 인물을 내세워 도덕을 말하고 있지만 꾸며진 이상향처럼 현실감 없는 장면을 연출하고 말았다. 이렇게 가볍고 현실감 없는 인공적인 이상향은 분명 로코코적인 것이다.
요컨대, 호가스와 그뢰즈는 이념적으로는 로코코의 장식성과 화려함을 거부했지만 로코코 시대의 취향에 젖어 있었다. 때문에 이들의 그림은 형식과 내용이 맞지 않는 그림이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결과는 그림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겠다는 오만함 때문에 빚어진 촌극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촌극 또한 그 시대의 단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