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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동 품바 부부 - Part 1

by 김주영

'자, 대망의 김치 냉장고는 어느 분에게?'

광수가 빵빠레와 함께 빨간 복주머니에서 접혀진 종이 한 장을 뽑아 들었다.

'15번!, 15번!!'

'웜메, 여기요, 여기!'

깜짝 놀란 영도가 놀라며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다리를 조금 절면서 무대 앞으로 뛰어 나왔다.

90년대 어느 연말, 부산 화명동 로타리에 있는 극장식 가라오케 '칵투스'는 30명 내외의 단골들을 초청하여 소소한 경품 추첨과 함께 거의 무료로 술과 노래를 이용할 수 있는 고객감사 송년회 이벤트를 수 년째 열어 왔다.

'와, 여기 얼굴이 아주 예쁘시고 교양미까지 있어 보이는 숙녀분께서 나오셨네요. 동그란 안경도 잘 어울리세요. 간밤에 좋은 꿈 꾸셨나봐요?' 이벤트의 MC이자 초청가수인 광수가 경품응모권을 확인하며 말했다.

언변 좋고 유쾌하며 잘 생겼고 노래까지 꽤 잘하는 광수는 같이 온 밴드와 함께 세 곡 정도의 노래를 부르고 칵투스를 떠났다. 떠나면서 세 쌍의 부부동반으로 이벤트에 참석한 영도팀이 앉은 테이블에 와서 공손히 인사를 남겼다.

'젊은 사모님, 재밌게 잘 놀다 가시오.'

맥주 몇 잔에 빨갛게 홍조를 띤 영도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목례로 반응했다.


'어쩔겨? 조방앞에 가서 먹을 껴? 여기서 먹고 갈까.' 광수가 박박머리 드러머에게 물었다.

'난, 시방, 생각 없으라. 그나저나 광수 너, 아까 야메로 추첨한거 아닌겨? 그 아짐시 동향이라고 눈독들인 거 같은디' 박박머리가 말했다.

'그래. 응모권 찢어 반쪽은 손바닥에 두었다. 워쩔겨?' 얼굴을 들이밀며 광수가 대꾸했다.

그들은 택시를 잡아탔다.


댄스타임으로 열기가 뜨거워진 칵투스 한 구석에 영도와 남편의 직장 동료 한 사람이 술잔을 홀짝거리며 테이블을 지키고 있었다.

동료의 젊은 아내와 영도의 남편은 테크노 음악과 블루스 음악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함께 왔던 한 팀의 부부는 자리를 먼저 떴다. 영도의 남편은 부산에 있는 지방은행에 근무했고,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이후로 칵투스에서 실습을 곧 잘 했다. 직장 동료도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목포 출신인 영도는 자그마하고 하얀 얼굴의 미인이다. 가끔씩 말과 행동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는 괄괄하고도 급한 성격을 보인 적도 있긴 하지만, 그런 일은 어지간해선 없다. 그녀는 십대 초반에 심하게 교통사고를 당해 큰 수술을 받았고 오랜 재활치료 끝에 다리를 조금 절게 되었다. 그 때의 휴유증으로 아이를 낳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임신을 했고 결국 백일이 조금 지나 유산이 되고 말았다. 우울해하던 영도를 남편은 챙겨주지 못했다. 직장 동료의 부인과 칵투스에서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결국 남편은 '영도야. 미안하다. 나를 자유롭게 해 줘'라는 한 마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

못 먹는 술을 마시고 며칠을 취해 있던 영도는, 어느날 초저녁 개통한 지 얼마 안된 구포대교쪽으로 한쪽 슬리퍼만 끌며 걸어 갔다. 울며 걸어가는 그녀를 쫓아와서 잡는 이가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고 헐떡거리며 쫓아 온 광수였다. 밴드 동료들과 택시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목격한 후 한 달음에 쫓아 온 것이었다.

'시방, 뭐한다요?'


광수는 무안 출신이라고 했다. 판소리를 포함하여 이런 저런 노래를 곧잘 했고, 영도보다 세 살 어렸다. 그는 며칠 동안 영도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저한테도 세 살위 누이가 있었는데 어렸을 때 마마로 죽었다고 했다. 오래지 않아 영도는 옆을 서성이던 그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

며칠이 지나 광수는 술과 노름 등 예전의 방탕한 생활로 돌아갔다. 술 먹고 싸워서 눈과 코 주변이 엉망이 된 채 유치장 생활을 한 달 가까이 하다가 돌아왔다. 영도는 그를 받아 주었다.




(Part 2 완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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