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두 달 살기를 마치며

정리하기 힘든 감정의 두께나 질감이란 것도 있음

by 서현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소중히 흘렀다.

인도로 돌아갈 날이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었다.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다. 전시회가 끝나고 무척 피곤했던 것, 중국인 투숙객들과 아주 재미있게 놀았던 것, 그리고 떠나기 직전 동갑내기 한국인 여행자 박이 찾아와 무럭 즐거웠던 것 외에는 똑같은 일상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김치를 만들었다. 자간트와 우파리 아저씨, 그리고 남겨질 하이랑카 가족들을 위해서다. 김치는 이제 너무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쉽게 시작했다가 금방 끝났다. 조그만 배추를 여러 개 사다가 소금에 재우고, 소를 바르고, 통에 넣어 살짝 숙성시킨 뒤 친구들을 찾아가 선물했다. 마지막 김치는 주는 나도 받는 친구들에게도 조금 슬펐다. 살기로 결정함으로써 유예시켜 온 이별이 며칠 안에 다가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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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김과 우파리네 가족들



한국인 친구 박과 함께 뚝뚝을 타고 마을을 돌았다. 전시장에 미처 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액자를 건네기 위해서다. 그들은 전시에 참석하지 못한 걸 미안해했다. 전시장에 입고 갈만한 단정한 옷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헤아리지 못한 마음이기도 했다.

나중에 김에게 전해 들었는데 어떤 할아버지는 액자를 받고 엉엉 우셨다고 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사진을 찍혀본 적 없는 분이었다. 아마 내가 찍어준 사진은 그분의 첫 사진이자 영정사진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지나치게 뿌듯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큰 의미의 말은 나를 버겁게 했기 때문이다.



난민촌에 사진을 나눠주러 갔을 때



곧 마지막이 된다고 생각하면 자주 울음이 나왔다. 마지막 산책. 마지막 장 보기. 마지막 인사. 마지막 뚝뚝. 마지막 바가지. 모든 순간이 시작되고 끝날 때마다 뿌리가 시큰했다. 마트 시큐리티들과 인사를 나눌 때, 그랜드 호텔 직원과 커피를 나눠마실 때, 김과 산등성이를 걸으며 비를 맞을 때. 끝이란 건 자꾸 뭔가를 썰어내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마음이 도려내지지 않게 노력했다. 물론 쉽게 되는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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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출신 자간트. 서울은 모르지만 한국을 좋아하는 아지트



떠나기 며칠 전 나는 응급실을 다녀왔다. 타운에서 햄버거를 사 먹었는데 어쩐지 먹자마자 10분도 되지 않아 잠이 쏟아졌다. 그러면서 속이 지나치게 메스꺼웠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풀리고 시야가 흐려졌기 때문에 나는 구토 증상을 겨우 참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졌고 14시간 만에 정신을 차렸다.

속이 여전히 안 좋고 머리가 핑핑 돌았기 때문에 결국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을 갔다. 히란은 없었고 매니저는 너무 바빴고 엄마는 영어를 못했기 때문에 구급차에는 혼자 탔다. 열병을 꾸역꾸역 참으며 의사들에게 증상을 설명했다. 음식에 수면제를 타 기절 시킨 뒤 나쁜 짓을 하는 인간들은 세계 어디에나 있었다. 나는 햄버거에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의사의 생각은 달랐다. 의사는 가벼운 감기 증상일 뿐이라고 진단했다. 햄버거를 먹자마자 곧장 그렇게 되었음을 설명했지만 소용없었다. 수액 한 팩을 다 맞을 때까지 나는 억울해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도 응급실에 갔던 것만 빼면 퍽 괜찮은 나날이 이어졌다. 나는 하이랑카 식구들을 위해 예쁜 옷을 한 벌씩 샀는데 어쩐지 사이즈가 세 사람에게 딱 맞아서 부쩍 좋았다. 히란에게는 보라색 니트를, 매니저에게는 점퍼를, 엄마에게는 엄청 화려한 색깔의 치마를 선물했다. 히란과 매니저는 옷에 돈 쓸 줄 몰라 매일 같은 옷만 입었고 엄마는 새 옷을 살 돈이 없었기 때문에 선물은 모두를 만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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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준 선물을 들거나 입고



떠나기 전날, 하이랑카 가족들은 파티를 준비했다. 닭고기를 잔뜩 사다 음식을 만들고 샴페인과 작은 선물을 준비해 조촐히 환송회를 했다. 파티에 함께 어울리고 싶다는 손님이 더러 있었지만 히란이 정중히 거절했다. 함께 살던 이와의 마지막 식사라고 하니 모두 이해해주었다. 나는 파티란 자고로 시끌해야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어쩐지 오늘만큼은 히란이 하는 대로 두고 싶었다. 우리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작은 영어에도 부쩍 귀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지아. 마지막은 아닌 거야. 그렇지?"


반백이 다 되어가는 히란도 이별은 아쉬운 모양이었다. 엄마는 내가 사준 옷을 어루만지며 마이!마이! 했고, 매니저는 부처님 같은 얼굴로 웃었다.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도저히 울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너무 자주 운다고 놀림을 받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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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차려준 음식. 샴페인을 준비한 히란
너무 울어서 못생겨진 나


많은 것들을 했다. 글로 다 적지는 못했지만 무수한 날들을 꽉 채워보냈다. 폭우 때문에 3일 동안 정전 된 적도 있고, 옆집 할아버지가 자살한 사건도 있었고, 동네에 크게 불이 나 바가지를 들고 달려간 적도 있었다. 이상한 손님이 너무 많아 자주 싸웠고,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쁜 차별을 당한 적도 있었고, 식구들끼리도 한 번씩 의견이 안 맞아 큰 소리 낼 때도 있었다.


이 집을 드나들었던 사람들과도 여러 순간을 남겼다.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던 한국인 손님도. 리스닝 실력을 부쩍 향상시켜주었던 서양인들도. 이유 없이 너무 많은 사랑을 주었던 중국인 손님과, 내가 만든 김치를 아주 잘 먹어준 일본인 손님들, 그리고 내 라면을 몰래 훔쳐 먹곤 악동같은 얼굴로 미안하다고 말하던 이스라엘리까지. 모든 이들의 얼굴이 기억에 지문 처럼 남았다. 아주 고유한 기억이기 때문에 떠올릴 때마다 나는 자주 웃었다.

두 달을 살았지만 특별히 뭔가를 깨달았다고는 못하겠다. 깨닫는다는 건 쉽게 오지 않는 순간이고, 무엇보다도 나는 아무거나 섣불리 깨달아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춤추는 엄마. 도우터 마이마이. 목소리가 들려요.
히란과 매니저



그저 나는 하이랑카에 사는 동안 몸의 안과 밖을 무럭 살찌운 것. 나누는 기쁨을 약간 알게 된 것. 베푼 만큼 돌아오는 기적을 눈으로 목도한 것. 영어를 못해도 말은 통한다는 것. 내가 아는 게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여행은 그저 시간만으로도 친구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텍스트로 가지런히 정리하기 힘든 감정의 두께나 질감이란 것도 있음을 알았다.


살아보기로 한 건 좋은 결정이었다.

누와라엘리야는 빼곡한 불편이 있는 도시지만 무수한 이야기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 속에 나의 시간을 보탤 수 있었던 건 무척 다행인 일이었다. 내 스스로 결정한 일중, 아주 잘 한 일 중 하나기도 하다.



빨래도 예쁜 누와라엘리야
멀리서도 인사하는 사람들
자주 찾아가던 교회 목사님의 자녀. 저는 천주교인이지만 늘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이별을 앞두고 초대해주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많은 분들과 차와 과일과 음식을 나눠먹었어요
랑칸 친구들과 무슬림 복장도 입어보고요
한국어 봉사활동도 한 번 더. 얘들아 시험 꼭 통과해서 한국에서 보자
그렌드호텔 레스토랑에서 엄청 비싼 식사를
동네 할머니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길
너무 사랑하는 우리 동네
요리를 아주 잘 하던 중국인 친구 브로스
그가 만든 음식들
솜사탕 하는 타밀아저씨께도 사진을 드리러
편의점
가족들을 위한 선물
하이랑카에서 바라보는 모습
마지막 날 밤. 테라스에서 찍은 별
두 달을 보냈던, 하이랑카의 201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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