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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선 Sep 01. 2020

난 이제 더는 못해. 나 이제는 아빠한테 안 가요.

.애도.

일산의 친정집에서 산후조리를 한 지 삼칠일이 좀 지난 어느 밤.

아빠에게 문자가 왔다.

'아빠 혼자 먼저 하늘나라로 간다' 


그 밤, 케이블에서는 여명과 서기가 나오는 영화가 틀어져 나오고 있었고 끝까지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온 신경을 그 영화에 쏟아부어야 했다. 여명의 노래가 참 좋았던 기억이 나지만 다시 그 노래를 듣지는 않는다. 


난 이제 더는 못해. 나 이제는 아빠한테 안 가요. 


아이가 깰까, 식구들이 깰까 조용히 다짐하듯 말한다.  

언제나처럼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하지도, 어딘가에서 술 취해 울며 내 이름을 부르는 아빠에게 달려가지도 않을 거다.

돌아가시려면 벌써 돌아가셨지.

죽으려면 벌써 죽었어. 

언젠가부터 되뇌며 날 안심시키던 말들.



낮이고 밤이고 자지 않는 아이는 엄마와 할머니 말에 의하면 삼한 아이였다.

'어디서 이렇게 삼한 게 나왔나'  '우리 딸 잠 좀 자자. 무슨 애가 이렇게 삼해'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말을 하며, 얼굴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그렇지. 밤새 토끼잠을 자는 아이와 함께, 나도 같이 긴 밤을 꼬박 새우며 주문을 외우듯 아빠를 밀어내려 애썼지만 내내 마음은 아빠였다. 




아빠는 술만 먹으면 내 이름을 불렀다. 


난 아빠가 열 번을 부르면 열 번을 가고 스무 번을 부르면 스무 번 다 아빠에게 갔다. 


놀이터에서 놀다가도 아빠가 부르면 동네 슈퍼에 가서 술을 사다 드렸다.

'소주 두 병이요.' 빨리 놀이터로 돌아가야 하는데 항상 소주 두 병 세 병을 사야 하는 나는 봉투 안에서 병끼리 부딪혀 깨질까 뛰지도 못하고, 빠른 걸음을 걸어야 했다. 문 앞에서 하얀 얼굴로 날 기다리던 아빠는 항상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빨리 가 놀라고 금세 봉투를 건네받았다. 술봉지를 들고 들어가는 아빠가 무섭지도 밉지도 않았다. 아빠가 들고 가는 봉투에 맛있는 과자라도 들어 있는 게 좋겠다 생각했으니까.

친구들이 물었다. '왜 너네 아빠는 맨날 술 먹어?'  정말로 몰라 궁금해, 똑바로 내 얼굴을 쳐다보며 묻는다. 난 나뭇가지를 끄적이거나 모래를 만지작 거리며 민망함을 감추려 한다. 그래도 어렸기에 그런 상황에 그리 오래 풀 죽어 있진 않았다. 엄마가 부르기 전에, 날이 주홍빛으로 어두워지기 전에 조금 더 놀아야 하니까. 


할머니가 그랬다. 난 태생이 밝은 아이라고. 기상이 좋다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린 나는 밝은 내가 되기 위하여 잘 울지 않았고, 태생이 밝은 아이처럼 팔짝팔짝 잘도 뛰었으며, 웃으며 아빠에게 갔고, 엄마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동생과 TV를 보고 있으면 취한 아빠가 날 부른다. 조금만 더 tv가 보고 싶어 대답만 하다가 아빠의 목소리가 커질 때쯤 종종거리며 아빠방에 간다.

언젠가부터 아빠는 혼자 방을 썼다.

아빠방은 내 기억에 항상 노랑이다. 내가 사는 세상은 이색 저색으로 어지러울 만큼 많은 색을 가지고 있는데, 그 방에만 들어가면 아빠의 얼굴도 아빠의 눈도 노란색 같았고, 아빠는 그 노란방에서 항상 술을 마시거나 영화를 보거나 담배를 폈다.

바르게 앉아 있던 아빠의 기억은 별로 없다. 손을 머리에 대고 옆으로 누워 참 어렵게도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면 외로운 아빠는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어 졌고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 부른 나에게, 많은 말을 했다. 울다 웃다 결국은 화를 내면서. 

어린 난, 그 노란방에서 빨리 나가고 싶었지만, 엄마가 와 소리를 지르고 아빠와 싸울까 걱정이 되어 아빠가 하는 말을 들어주며 기분이 풀어지길 바랬다. 저 병에 있는 술을 빨리 마시고 잠이 들기를 얼마나 바랬는지 모른다.

어떤 날은 아빠의 술잔이 비워지면 아빠 대신 따라 드리기도 많이 했다. 얼른 다 드시고 주무셔야 조금이라도 더  tv를 볼 수 있을 테니까. 

가끔 엄마와 아빠가 싸우던 무서운 밤들도 있었지만 약하고 외로웠던 아빠는 많은 날들을 그저 떠들다 마시다 쓰러져 잠이 들었다. 술 먹는 아빠보다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밤이 더 싫었던 나는 엄마가 그 방에 가는 게 싫었다. 엄마가 들어가는 날, 그밤은 무서운 밤이 되고 아무도 잘 수 없었고 동네가 소란해졌으니까. 




왜 어젯밤 에는 전화를 안 했을까. 벌써 수십 통은 했을 사람이. 또 어디 길에서 잠들기라도 했나.

그래. 여느 날처럼 술 드시다 잠드셨겠지.

그래. 무슨 일이 났으면 전화가 와도 벌써 왔을 거야.

다시 어린날의 내가 되어 당장이라도 아빠가 있는 노란방에 가고 싶었지만, 안고 있는 아이를 보며 다시 다짐을 한다. 


난 이제 더는 못해. 나 이제는 아빠한테 안 가요. 
아빠가 부르면 달려가는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이제 아빠의 노란 방은 나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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