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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예진 Aug 12. 2021

날아간 말의 파편들

몸이 아파 마음이 덜 아픈 날의 기록



실수하지 않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저질러버리고, 펄떡거릴 때보다는 한 풀 꺾였을 때 드러내자 하면서도 빗장을 풀고 만다. 그런 차원에서, 몸이 살짝 견딜만하게 아픈 날은 나를 조금은 좋아할 수 있다. 아픔을 달래느라 몸에 힘을 빼고, 약기운이 신경을 이완시키면 내가 퍽 편안한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이다. 


한시적인데다가 약의 힘을 빌리기까지 한 뭉툭함에 의존하는 자기애라니. 그러나 그런 나를 비춰보면서 나는 내게 관대하다. 아픈 날이니까. 아픈 사람한테는 잘해줘도 되니까. 몸과 마음이 눅진하게 늘어져도 생각만큼은 명징해지는데, 아마도 수용할 수 있을만큼만 정보를 입출력하느라 뇌가 선택적으로 단순한 곳에 집중하는 것 아닐까 싶다. 


어릴 때 여동생과 하던 놀이 중에 바다 표류 놀이라는 게 있었다. 한 사람은 침대 위에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방바닥에 배를 대고 헤엄치듯 기어다니면서 무언가를 구조하는 거다. 무인도(침대)에 있는 사람이 저기 저걸 구출해와야 한다고 가리키면, 바다(방바닥)에 표류 중인 사람이 배를 밀어 헤엄치거나 뗏목(방석)에 앉아 물살을 저어가며 사람(인형)을 구출해 무인도로 데려다주는 놀이였다. 무인도 담당은 게으르고 표류자는 기운 빠지는 놀이였다. 그 놀이를 개발하고는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우리는 여러 번 그러고 놀았는데, 나는 언니의 권력으로 주로 편안한 무인도를 맡았다. 


아픔을 핑계삼아 무인도에 칩거하며 혼자 그 놀이를 했다. 헤엄은 치지 않아도 되었다.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구조할 ‘책’들이 꽂혀 있었다.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책들을 다 구할 순 없다고, 꼭 살려야 할 것들부터 구하자고 생각하며 구조할 것들을 둘러봤다.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내가 구해내고 싶은 책들이 뭔지, 파도가 쓸어가도 아쉽지 않을 책들이 뭔지, 그리고 또 같이 쓸려가버렸으면 싶은 내 말의 조각들이 뭔지. 


좋아하는 소설가가 새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책의 표지가 내 마음 속 무인도 주변을 떠다녔다. 그는 또 일순위로 구조될 소설을 써냈을까? 하루종일, 나의 말 파편들이 어지러이 돌아다니는 바다 한가운데에 그의 책이 떠있었다. 눈부시고, 아프고,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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