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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민정 Jan 02. 2022

미역국을 끓이는 시간

오랜 시간 뭉근히 끓이고 또 간을 맞추는

 건방지게도 누군가의 사랑 없이도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사랑한다’라는 흔한 말조차 하지 않는 그들이 나를 사랑하는지 의심하는 시간이 길었다. 그날은 저녁부터 몸이 으슬으슬 아프기 시작했다. ‘아이고, 지금까지 아팠던 것 중 두 번째 손가락 안에 든다.’(첫 번째는 신종플루에 걸렸을 때였다.)라고 생각하며, 천장을 멀뚱히 보고 있으니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다. 짐을 내리곤 누워있는 나를 살핀다. 20살이 되던 그해, 학생 때 생활을 청산이라도 해야 하는 듯 몸에 탈이 자주 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괴로웠던 건 알레르기였다. 알레르기 반응을 족히 10번은 겪곤 어렴풋이 달걀 알레르기라는 걸 알아챘다. 뜬금없이 생긴 알레르기에 당황스러웠으나 온라인에선 그 당황스러움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말하기론 면역력을 챙기지 않으면 어느 날 몸이 알레르기 돌림판을 돌려 무작위로 알레르기가 생긴단다. 심지어 그 현상은 ‘알레르기 돌려 돌려 돌림판’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까지 붙여져 있었다. 


‘내 몸도 알레르기 돌려 돌려 돌림판을 돌려버렸구나!’


 밖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에겐 달걀 알레르기는 아주 복잡한 일이었다. 빵으로 끼니를 때운 어느 날은, 눈두덩이부터 몸 전체에 알레르기가 올라와 수업을 빼고 병원에 가야만 했다. 조금 독특했던 건 햄버거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었다. 학교 앞 두 개의 햄버거 가게가 있었는데, 한 곳은 반응이 나타나고 한 곳은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 햄버거가 먹고 싶은 날은 알레르기 반응이 없는 그 햄버거 가게에 갔지만, 사실 그 가게는 파는 메뉴 중 햄버거가 가장 맛이 없다는 무시무시한 햄버거 가게였다. 그 집은 감자튀김 맛집이었다. (매번 구시렁거리긴 했지만 맛없는 햄버거를 먹어준 친구에게 지금이라도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겠다.)


 아무튼 그날은 흔한 알레르기 반응이 아니었다. 이유 없이 열이 치솟았고 어지러움을 동반했다. 병원 문을 닫은 시간이었고, 엄마는 애꿎은 전기장판 온도만 높일 뿐이었다. 어떤 아픔은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 거라는 어렴풋한 예감이 들지만, 어떤 아픔은 시간만이 답이 아니라는 단호한 확신을 준다. 그날은 단호한 확신이 손을 들었다.


- 엄마, 도저히 안 되겠어요. 응급실 가야 할 것 같아요.

- 금방 아빠 오실 거니까 응급실 다녀와. 나도 몸이 안 좋아서 둘이서 다녀와야겠네.


 아빠가 집에 오자마자 차를 타고 가장 가까운 응급실에 갔다. 몇 개의 검사를 하고, 주사를 맞고 침대에 가까스로 누웠다. 약 기운에 잠이 살짝 오는 듯했고 자고 일어나니 한 시간쯤 지나 있었다. 아빠는 조금 먼 곳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사랑 없이도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건방진 마음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함부로 펼쳐지지 못하게 아주 납작하게 접혀 구석에 처박혔다. 생사가 오고 가는 응급실에서 사랑받는 느낌을 덜컥 느껴 버리다니. 염치없고, 눈치 없지만. 그 마음을 고이 접어 비어 버린 마음의 공간 한 구석에 소중히 넣어두었다. 생각보다 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새로운 링거로 교체하자 잊었던 알레르기 반응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달걀 알레르기가 아니었어?’ 다행히 다른 링거를 맞고 한 시간쯤 지나니, 열이 내렸고 의사는 보호자인 아빠에게 입원을 권유했다.


- 입원이요?

- 네.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아요. 입원하셔서 다른 검사도 받아 보시죠.


 갑작스러운 입원 권유에 당황했으나, 동네에서 그 병원은 ‘입원 권유를 잘하는 병원’으로 유명했다. 일단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몸이 좋지 않다고 말했던 엄마가 걱정됐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후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보일러를 세게 틀었나. 아니다. 은은히 퍼져 있는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이건 미역국이다. 엄마는 미역국을 가득 담고, 흰쌀밥과 함께 식탁에 내려놓았다. 내린 열과 함께 허기가 찾아왔다. 밥맛이 도는 걸 보니 살만한가 보다 안심이 들었다. ‘밥 먹을 때 국이 꼭 있어야 한다’라는 부류의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재빠르게 미역국에 밥을 말아 넣곤 밥알이 채 부스러지기도 전에 덩어리 진 밥알을 입안 가득 집어넣었다. 따뜻한 국물이 몸을 감싼다. 기분 좋은 열기로 얼굴까지 불그스름해진다. 몇 숟가락을 더 집어넣고는 식탁 앞에 앉은 엄마에게 응급실에서 알레르기가 올라왔다는 이야기, 입원 권유받았다는 이야기, 백혈구 수치가 낮다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조잘대며 늘어놓았다.


 생일 때마다 분명 그가 끓여주던 미역국을 수없이도 먹었는데, 그날의 미역국은 이상하게 더 깊고 진한 맛이 났다. 국에 말아 놓은 밥알을 꼭꼭 씹으며 문득 나를 기다리며 미역국을 끓인 그의 시간을 생각했기 때문일까? 좋지 않은 몸을 일으키고는 냉동실 어딘가 넣어 놓은 국거리 고기를 꺼내어 해동시키곤, 물을 받아 미역을 적당히 불리고, 고기를 참기름에 볶고 미역을 넣고. 응급실에 있을 나를 생각하면서 오랜 시간 뭉근히 끓이고 또 간을 맞추는 그의 시간. 국을 먹을 때 대충 건더기만 건져 먹었던 나는 그날 처음으로 숟가락으로 그릇의 바닥을 긁어가며 미역과 고기와 국물을 남김없이 먹었다. 어쩌면 국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국이 끓는 동안 누군가를 뭉근하게 생각하는 그 시간을 아끼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그제야 사랑은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알아차린다. 부정할 수 없는 몸짓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그들 방식의 사랑을 존중해주기로 한다. 어느 날엔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미역국을 끓여야겠다. 미역을 불리고, 고기와 미역을 볶고, 물을 넣고 오랜 시간 끓여 간을 맞추고. 국그릇에 가득 담아 그의 앞에 내놓아야겠다. 사랑을 그릇에 내놓아야겠다. 그는 그저 내 앞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들을 조잘거리며 그때의 나처럼 맛있게 밥을 먹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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