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힘들면 연락하고"라는 말이 좋았어.
친구야, 얼마 전부터 너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다 오늘에서야 편지를 쓰네. 심지어 부치지 못한 편지야. 우리도 벌써 12년 친구네. 우리 사이에 많은 친구들이 있어서 사실 두 명에서 지낼 시간이 없었잖아. 그러다 같이 취업 준비할 때, 맥주를 마시다가 그날 제주도행 비행기를 예약했던 그날 이후로 우리 사이가 조금 달라졌던 거 같아. 아마 너도 그렇겠지? 지금에서야 생각하는데 나는 지금까지 갔던 여행 중에서 그때가 가장 좋았어. 분명 유럽여행도 갔고, 혼자 갔던 대만 여행도 있고, 우리나라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그때 제주도가 나는 아직도 잊히지 않아.
며칠 전에는 그놈의 새벽 감성 때문에 사진첩을 한참을 넘겨보다가 제주도 사진을 발견한 거야. 사진 안에 우리가 너무 어리더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더라. 돈도 별로 없어서 거의 점심 겸 저녁을 먹으면서 다니고, 배가 고파서 카페에 가면 꼭 라테를 마시기도 했지. 차 렌트도 없이 뚜벅이로 월정리에서 세화까지 2만 보 이상을 걸었던 그날도 생각난다. 또 숙소에서 만난 언니와 오빠들과 밖에 나가서 소주병으로 볼링핀처럼 세우면서 술잔을 비웠던 그 저녁도 생각나고.
또 저녁 먹기 전에 잠시 들렀던 성산일출봉에서 봤던 일몰도 생각나. 그때가 아직 생생하게 생각나는 건 왜일까. 너도 그럴까? 내 인생을 필름으로 만든다면 아마 그 제주도 여행은 빠지지 않을 거야.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했던 우리와 그때 들었던 장범준의 노래 가사가 아주 절묘했어. '사랑이란 게 원래 시간이 지날수록 설렘보다는 편안함이 자릴 잡나요. 설렘이 없는 사랑 편안함만 남은 사랑.' 이 가사를 몇 번을 곱씹으면서 우리도 편안함이 자리 잡는 사랑을 하자고 약속했잖아. 신기하게도 너는 지금 그런 사랑을 하는 거 같아. 나는 기뻐.
친구야 시간이 갈수록 계속 너에게 마음이 쓰여. 우리의 상황이 조금 비슷하기 때문일까. 남자 형제가 있고, 썩 다정하지 않은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런 환경 말이야. 근데 너와 나는 조금 다르기도 하지. 너는 다정한 편이고, 나는 사실 조금 퉁명스러운 편이잖아. 매번 남을 신경 쓰고 배려하는 너의 모습이 좋다가도 장녀로서 매번 양보만 했던 많은 경험들이 너를 그렇게 만든 게 아닐까 걱정해. 나는 막내라 내 고집대로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너는 매번 너보다 남의 불편을 먼저 걱정하는 듯 보이거든. 분명 너는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지금보다 조금 더 너를 생각해도 돼. 아니해야 해. 사람들은 생각보다 이기적이거든. 나조차도.
얼마 전에 우리 집에 와서 진탕 술을 마신 날, 내가 술김에 며칠 전에 침대에 누워서 눈물이 너무 많이 나는데, 힘든 얘기를 아무한테도 할 수 없었던 날들이 있었다고 말했잖아. 그러면서 나는 힘든 일이 진행되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어. 그 힘듦이 조금 덜어지거나 아니면 아예 종료된 상황에서 그땐 힘들었었다고 과거를 털어놓는 사람이라고. 너는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더니 힘든 날에 그런 고민 없이 연락하라고 말했어. 그러곤 네가 다음날 "힘들면 연락하고"라는 메시지를 보내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지. 또 다음날은 커피를 선물하며,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의 유미처럼 작가 세포를 깨워서 열심히 글을 쓰라고 말했지. 그 뒤로 너를 생각하며 이 편지를 쓴다.
친구야, 너의 "힘들면 연락하고"라는 말이 좋았어. 마음에 진득하니 내려앉았어. 분명 어느 날엔가 또 견딜 수 없는 힘듦이 찾아오겠지만, 또 아무에게도 그 힘듦을 말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살겠지만, 너의 그 말이 든든히 내 뒤를 바쳐주고 있을 거 같아서 외롭지 않을 거 같아. 고마워. 너도 힘들면 꼭 연락하고. 이만 줄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