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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민정 Sep 23. 2022

혼자 있는 생일

베푸는 게 행복인 줄 아는 사람이 돼야지.

 생일이다. 아무런 약속도 없는 생일. 어제는 전 직장 동료들과 1만 6 천보를 걷는 한강 피크닉을 했고, 내일은 친구들을 만날 예정이다. 생각해보니 혼자 있는 생일은 처음이다. 이리저리 연락해 약속을 잡을 순 있지만 이상하게 이번 생일은 혼자서 조용히 보내고 싶다. 생일. 좋은 날이긴 하지만, 나에겐 조금 어려운 날이다. 누구를 콕 집어 만나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다른 날보다 괜히 더 많이 행복해야만 할 것 같아서.


 다른 친구들 생일에 1대 1로 만나는 일도 나에겐 조금 부담스러운 일이다. '친구의 소중한 날을 망쳐버리면 안 된다. 그래도 일정 이상의 행복한 날이 되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비장한 의무감을 가지고 친구의 행복감을 감시한다. 대단한 케이크는 아니라도 작은 조각 케이크에 불을 붙여 노래를 부르고, 소원을 비는 모습을 보곤 또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겨준다. '생일 축하해'보다 더 멋들어진 말을 건네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도 생긴다. 이때까지 그 친구에게 고마웠던 일들을 얘기하거나 우리의 즐거운 미래를 약속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즐거운 날을 축하해주는 건 정말 기쁜 일이지만 부담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나로서 누군가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 쉽지 않다.


 다른 날과 똑같이 아침에 일어나 요가원을 간다. 어제 수업에서 무리했는지 몸이 한층 더 뻐근하고 무겁다. 골반을 앞으로 앞으로. 숨을 후후. 다행히 요가를 등록할 때 나에 대한 불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덕분에 요가 선생님은 오늘이 내 생일인지 모른다. 괜히 어색한 생일 축하의 말이 오고 가는 건 조금 불편한 일이다. "주말 잘 보내세요. 고생하셨어요."의 담백한 말을 서로 건네곤 집으로. 요가를 마치고 종종 아이스크림 두 개 정도를 손에 쥐고 가던 그 가게 앞에서 조금 망설인다. 냉동실에 남아있는 아이스크림이 생각나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오늘 집중해서 운동했던 골반과 팔과 허벅지가 뭉쳐 걸음이 느려진다. 집 앞에 도착하니 전화가 온다. 엄마다.


- 생일 축하해 딸. 밖이니?

- 요가하고 집 가고 있어요.

- 미역국은 먹어야 하는데. 요즘은 잘 나오더라. 요리라도 해서 먹지?

- 굳이요?

- 오늘 친구들 만나서 밥 먹니?

- 네. 그러려고요.

- 친구들이랑 밥 같이 먹으라고 20만 원 보냈다. 맛있는 거 먹고. 생일 축하해


 다소 짧은 대화를 하고 전화를 끊는다. 사실 오늘 약속 없는데.. 멀리 떨어져 사는 딸이 생일날 약속이 없다고 하면 속상해할 엄마를 위해 작은 거짓말을 한다. 엄마는 매년 생일 때마다 20만 원 정도의 돈을 보내며 친구에게 밥을 사주라는 말을 한다. 늘 생일에 함께한 친구에게 그 돈으로 맛있는 밥을 대접했다. 솔직히 이전엔 내 생일인데 왜 다른 이들에게 내가 밥을 대접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다행히 지금은 안다. 기쁜 날일수록 남에게 더 대접하고 싶다. 내가 기쁜 날 같이 있는 소중한 이들도 기쁘면 좋겠다. 그것만으로 나는 조금 더 행복해진다. (남의 기쁨을 축하해주는 건 생각보다 많은 품이 들어가는 일이다.) 엄마는 그 마음을 이전부터 알았겠지. 참 다정한 사람. '베푸는 게 행복인 줄 아는 엄마 같은 사람이 돼야지'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친구들의 축하 메시지가 많이 왔다. 기억에 남는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데 물건은 취향을 타서 어렵다며 앞으로도 주체적인 멋진 삶을 살자고 말해주는 친구, 싫었던 기억은 훌훌 털고 건강은 잘 챙겨야 하니까 건강검진을 받으라는 친구, 생일 선물로 캠핑의자를 사주곤 한강 가자는 친구. 생일 때마다 나는 내가 베푼 것에 비해 많은 것들을 받는 사람인 걸 알아챈다. 많은 수의 친구들은 아니지만, 늘 나의 건강을 걱정하고 내 시간들을 궁금해하고 끼니를 걱정하는 그들이 있어서 나는 밥을 짓고, 글을 쓰고, 산책을 하고, 조금은 웃고, 울기도 하고 또 푹 잔다.


 오늘도 이렇게 혼자 있을 수 있음은 분명 내가 혼자가 아님을 알기 때문임을 안다. 지금이라도 오늘 시간 되냐고 하면 어디서 만날까 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혼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혼자 있음을 택한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반납하고, 한 달 전 구매 신청했던 희망도서를 대출하고, 며칠 전부터 드나드는 마음에 드는 동네 카페에 가서 여러 권을 뒤적이며 몇 장 씩 읽어야지. 그러곤 다정한 사장님이 있는 동네 보틀 샵에 가서 요즘 빠져있는 화이트 와인을 사야지. 라벨이 가장 이쁜 걸로. 그걸 들고 집으로 가서 와인잔에 콸콸콸 따라서 마음에 들면 한 병을 다 비워야지. 그리곤 취기가 오른 상태로 누워서 유튜브에서 알고리즘 파도를 타다가 다음날 점심까지 늘어지게 자야지. 내일은 친구들에게 열심히 축하받고 나도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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