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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민정 Sep 30. 2022

둥글게 모여 앉은 우리

내가 아닌 것들과 내가 아는 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하며

미야옹. 냐아옹

 뭐라도 해보려고 4시에나 나와 분리수거를 하고 있는 뒤에서 어떤 음성이 들린다. 이어폰을 끼고 있었으면 듣지 못했을 소리다. 이어폰을 끼지 않고 나와서 다행이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 오피스텔 대표 고양이가 나를 부른다. 나를 부른다고 말하는 건 착각이 아니다. 정말 그곳엔 나만 있었고, 내 눈을 보고 계속 소리를 냈고 내 근처로 걸어왔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존재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사람의 말 그중에서도 한국어만 알아듣는 그런 사람이란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니. 물이 부족한 거니. 배가 고픈 거니. 아니면 놀자는 거니.' 어떤 말일지 생각하다가 조용히 왜애-하고 고양이에게 말해본다. 냐아옹. 무슨 말을 하는데 나는 여전히 못 알아듣는다. 착한 분이 늘 챙겨주는 밥과 물은 충분한데, 어떤 도움이 필요한 거니. 너도 답답하겠지. 나도 답답해. 이렇게 사람 말만 알아들을 수 있어서 미안해. 그럼 나도 사람 노릇은 해야 하니 잠시 자리를 비울게. 하고 발걸음을 옮기니 그제야 그 자리에 다리를 쭉 펴고 누워서 나를 본다. (그냥 놀자는 거였나.)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며 내가 아닌 것들과 내가 아닌 사람들의 처지를 얼마나 모르는지 생각한다.


 어느 날은 친구를 만나러 버스를 타는데, 날이 좋아서 그런지 사람이 가득 찬 만차 버스였다. 저상형 버스. 학생 때는 저상형 버스가 거의 없었다. 100대에 1대쯤 있었나. 높은 계단이 있는 버스엔 걸음에 문제가 없는 나는 훌쩍 그 버스를 올라탔지만, 무릎이 아픈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아주 어렵게 버스에 올라탔다. 심지어 그 버스는 계단밖에 없어서 휠체어는 올릴 수 없는 듯했다. 올릴 수 있다 해도 아마 나머지 승객의 눈초리를 감당할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당연히도 저상형 버스가 100대에 1대쯤 있는 시절에는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을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저상버스는 교통약자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오늘도 널찍이 마련되어 있는 휠체어 좌석에는 걸음에 문제가 없는 나와 그 어떤 이들만 서있을 뿐이다. 임산부석은 그대로 임산부가 부담 없이 앉을 수 있도록 비어두는 자리인데, 휠체어석은 이렇게 비어있지 않아도 되는지 따위를 서서 생각했다. 아마 비어둬야 하는 좌석이래도 바쁜 우리들에게 비어둘 마음의 여유 따위는 없겠지만. 다시 내가 아닌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외출 한번 하기 위해서 교통편만 알아봐도 되는 나와는 달리 버스든 지하철이든 그곳까지 가는 것이 문제고 또 그곳에서 이동수단으로 올라타는 게 문제고, 또 내려서는 다시 목적지까지 가는 게 문제인 그들. 그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자리가 있대도 그 자리에 있지 못하는 그들을 조금 오래 생각한다. 고작 나태함만이 외출에 걸림돌인 내가. 그들의 자리에 서서.


 회사는 큰 은행은 물론 증권 회사가 많은 곳에 있었다. 본사가 많이 위치한 탓인지 한 골목만 넘어가도 건물 앞에서 팻말을 들고 소리를 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확성기를 들고 어떤 사람들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우뚝 서 있는 그 건물을 향해. 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그 건물은 끄떡도 안 하는데 그들의 목소리는 나날이 커졌다. 우리나라의 회사와 노동자는 진정으로 가까워질 수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어느 날은 나는 그들 옆을 걸으며 날씨가 좋다며 기뻐했고, 금요일이라며 기뻐했다. 내가 아닌 그들의 처지가 눈에 들어온 건 내가 회사와 멀어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물론 내가 멀어지려고 한 건 아니다. 회사가 아니지 그 윗분들이 나를 억지로 회사와 멀어지게 만드려고 노력 중이었다. 자리에 앉아있어도 고역이었고, 회의실에 들어가도 지옥이었다.


 다행히 자리를 옮겨 다니며 일할 수 있는 회사였는데,  어느 날은 '자리에 없으니까 제가 뭘 하는 줄 모르죠.'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쪽도 제가 무슨 일 하는지 모르잖아요; 말은 바로 합시다.) 나와 같이 다니던 디자이너들에게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같은 회사에서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는 건 명백한 괴롭힘이었다. 그때부턴 내가 아닌 그들의 팻말과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르지만 같은 투쟁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결국 우리가 이기게 될 거예요.'라는 응원을 하면서 그들 옆을 그렇게 걸었다. 고작 나는 비슷한 처지가 되어야지 내가 아닌 누군가의 힘듦을 들여다보는구나. 내 무관심에 누군가는 상처받았을 수도 있는데 이제야 자기 처지랑 비슷하다고 응원하겠다니. 참 이기적인 응원. 지금까지 내가 아닌 것들, 내가 아닌 사람들을 수없이 지나쳤던 그 순간들을 생각해본다. 상처받은 사람은 평생 기억해도 상처 준 사람은 금방 까먹는다는 말이 진짜인가 보다. 생각이 자주 멈춘다. 앞으로라도 누군가의 목소리를, 힘듦을 쉽게 지나치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어느 순간부터 힘내라는 말이 최악의 위로라고 평가받고 있는 것 같다. 힘을 낼 수 없는데 힘내라는 말은 너무 이기적인 말아니냐고. 정말 최악이라고. 이 말에 조심히 반기를 들어본다. 정말 힘든 날 친구가 보내 준 '힘내라'라는 말이 크게 위로가 됐으니까. 아. 분명 힘을 내는 건 내 문제긴 한데, 내가 힘을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정말 큰 힘이니까.


 힘든 길을 걷고 있는 소중한 이들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그가 너무 소중해서 이겨낼 수 있다고 응원하고 싶어도 섣부르게 위로해서 그를 다치게 할까 봐 망설인다면 그 걱정은 넣어두길. 안타깝게도 힘든 사람 옆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밖에 없다. 그래서 그 힘든 사람은 더더 고립된다. 힘든 사람에게는 누군가가 분명히 필요하다. 조심스럽게 그에게 손을 내밀어보자. 그 손들이 조용히 여러 번 맞잡혀 어느 날에는 우리가 서로의 눈을 마주치고 둥글게 모여 앉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니까. 누구도 외면받지 않은 채. 


 둥근 지구에 둥글게 모여 앉은 다정한 우리들을 오늘도 나는 상상한다. 내 앞에, 내 옆에. 누군가 앞에, 누군가 옆에. 누군가가 온기를 나누며 둥글게 모여 앉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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