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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민정 Sep 21. 2022

다정은 분명히 살아있다.

그러니 다정의 씨앗 정도는 준비해두자.

 세상에 혼자뿐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면 나의 다정한 이들을 생각한다. 이젠 볼 수 없는 이전 집 옆에 있던 카페 사장님, 작은 곳에 옹골차게 많은 술이 들어찬 보틀 샵 사장님, 아쉬탕가의 신세계를 보여준 요가 선생님. 이렇게 글로 내 다정한 이들을 늘여놓으니 더욱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정한 이들이 이렇게 많은 줄은 글로 쓰면서 알게 됐다. 그들에게 감사를 표할 겸 혼자인 것 같은 감정이 들 때면 수시로 꺼내볼 수 있도록 오늘은 글로 그들을 꺼내본다.


 아침에도 형광등을 켜지 않으면 밤이 되는 그 집에서는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야 세상과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맛있는 커피조차 내리지 못하는 공간이라면 더더욱 집순이가 밖순이가 되는 건 당연했다. 테이블이나 조명이나 카페의 분위기는 취향에 꼭 맞는 곳은 아니었지만, 집 앞에 위치했다는 이유로 처음 가본 그 카페는 카페라테 맛집이었다. 리브레 원두를 쓰고 있어서인지 우유와 에스프레소의 조합이 좋았던 것인지, 사장님의 손맛이 대단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처음 마신 카페라테의 맛은 '동네'카페(동네를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뭔가 운동복을 입고 나가는 동네에서는 엄청난 커피의 맛을 기대하지 않지 않나? 나만 그런가?)에서는 맛보지 못할 것 같은 고소하고 찐한 카페라테 맛의 진수를 보여줬다. 


그 이후로 나는 그곳에 매주 일요일마다 출석하기 시작했다. 삼 개월은 꾸준히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은 카페라테를 포장해서 마시면서 알게 모르게 사장님과 내적 친밀감을 쌓아가고 있었다. 사장님은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몰랐다. 미용실에 가도 필요한 이야기만 나누고 어디 사시냐, 남자 친구는 있냐 등의 사적인 이야기를 늘여놓는 곳은 불편해 다시 방문하지 않는 나로서는 아주 적당한 친절함이었다. 어느 날은 카페라테에 대한 애정이 식어갈 때쯤 카페라테 특유의 텁텁한 마무리를 느끼고 싶지 않은 그런 날이 있었더랬다.


- 아메리카노 한잔 포장해서 갈게요.

- 네. 네?

- 아메리카노 한잔이요.

- 오늘은 카페라테 안 드시나요?

- 아.. 오늘은 카페라테 말고 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어서요.

- 어.. 아메리카노 값 받고 카페라테 드릴게요. 드시겠어요?

- 어.. 괜찮아요. 오늘은 아메리카노로 마실게요.


 사장님은 나를 알고 있었구나. 삼 개월이 훌쩍 지난 그날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일주일에 한두 번쯤 와서 아이스 카페라테를 포장해가는 손님으로 내적 친밀감을 사장님도 쌓아오셨던 걸까? 카페에 오는 단골손님이 저 멀리서 보이면 주문도 받지 않고 그 메뉴를 만든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있지 않나. 그 단골손님은 그날따라 다른 메뉴가 먹고 싶으면 저 멀리서 손짓으로 "오늘은 아니에요! 오늘은 다른 게 마시고 싶어요!"라고 소리치거나 아니라는 제스처를 아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그런 재밌고 다정한 이야기. 나도 카페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매일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다. 그 손님은 늘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컵홀더 빼고 주문했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때까지 단 한 번도 다른 메뉴를 시킨 적은 없었다. '내가 그 손님이.. 된 건가..? 사장님은 미리 만들어두진 않았지만 머릿속으로는 카페라테를 미리 만들고 계셨던 건가..?' 단골손님의 메뉴가 바뀌자 추가 금액마저 마다하곤 그 메뉴를 청하는 그 사장님의 다정함을 나는 아직까지 기억한다. 이전까지 한 번도 나를 아는 체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나처럼 내적 친밀감을 쌓아가며, 조용하고 다정했던 사장님. 나는 5년 전쯤 이 단 한순간의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힘든 날 어느 한편에 있던 다정한 사장님과의 장면을 나는 몰래 조금씩 들춰서 보곤 다시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혼자 살게 되면서 카스나 좋은 데이 이외에 맛있는 술의 세계를 알게 되면서, 마트에 가면 꼭 와인샵이나 술 코너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내가 모르는 술이 있던가. 이런 술도 있네. 하며 술의 맛을 상상하거나 같이 곁들일 음식을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맛인지 전혀 모를 때 라벨이 이쁜 와인을 골랐다가 내 취향을 발견하기도 하면서 술을 마시는 즐거움에서 술을 고르는 즐거움까지 알게 됐다. 주말에는 마트에 걸어가 조용히 속으로 '뭐가 맛있는지 모르겠지만 추천받으려니 다들 바빠 보이네. 이쁜 라벨 와인이나 골라보자'하는 마음을 숨기며 술 고수인 양 한 병을 덜컥 집어 카트에 넣었지만, 일에 치여 돌아오는 평일에는 마트에 걸어갈 힘조차 없는 게 직장인이니까. 그러다 동네 산책을 하다 새로 생긴 보틀 샵을 발견한 게 신의 한 수. 규모는 작아 보이지만 와인부터 수제 맥주, 위스키까지 옹골차게 들어찬 그 보틀 샵을 마음에 이미 적립해두었다.


 '평일이지만 맛있는 술은 먹고 싶어'의 마음이었을 때 그 보틀 샵이 생각났다. 맛있어 보이는 수제 맥주를 4캔 정도 집어 들고는 멤버십 등록까지 하곤 돌아와 맛있는 맥주를 하루 만에 모두 즐겼다. 그 이후에도 '평일이지만 맛있는 술은 먹고 싶어'의 마음이 됐을 때, 그 보틀 샵에 가서 맥주든 와인이든 집어와 조용히 혼자서 홀짝이며 그 술을 즐겼다. 비가 내리는 그날도 보틀 샵에 가서 맥주를 여러 캔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곤 사람 얼굴이 과감하게 라벨로 붙어있는 레드와인 한 병을 손에 들었다.


- 맥주를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오늘은 와인을 사셨네요.

- 네..? 네. 맥주는 좀 배부를 것 같아서요.

- 하긴 오늘은 무엇이든 마시고 싶은 날씨죠. 맛있게 드세요.


 보틀 샵 사장님은 그전까지는 아는 체 없으시더니 마음속에는 제가 그 단골이 된 건가요? 어느 날 와서 맥주를 여러 캔 사가는 그 사람으로? 카페 단골과는 다르게 보틀 샵 단골은 조금 민망한 감정이 있긴 했다. 그러나 보틀 샵 사장님은 내가 그 술들을 혼자서 비우는지 여러 명에서 같이 비우는지 모르니까. 대충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은 사람으로 알고 있어 주길 바란다. 매번 많은 술들 앞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긴 나를 조용히 기다렸다가 그 말을 해준 조용하고 다정한 사장님. 그 말을 듣고 와인 한 병을 품 안에 안고 나왔을 때 여러 번 그 말을 곱씹다가 '오..! 시 같은 말이다..'라며 감탄하며 메모장에 받아 적었다. 무엇이든 마시고 싶은 날씨라니.


 집에 들어와 와인 코르크를 따고 한 병을 하루 만에 다 마셔버린 날. 비 오는 날에 종종 보틀 샵 사장님의 "오늘은 무엇이든 마시고 싶은 날씨죠"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 말을 곱씹으면서 다시 보틀 샵에 가서 조금은 오랜 시간 술 앞에서 고민을 하곤 라벨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들로 장바구니를 채운다. 한 손에 그 술들과 사장님의 조용한 다정을 가지고 집에서 술을 홀짝 마신다. 다정함이 섞인 취함이 좋다.


  할 일이 없는 요즘은 요가가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스케줄이다. 대부분 오전에 요가를 하지만 오후 요가를 가는 날은 집에서 밥을 먹고 카페에서 책을 몇 쪽 읽고는 요가를 간다. 그날도 오후 요가 가기 전에 자주 가던 카페를 뒤로하고 새로운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있었다. 독서 효율이 가장 좋을 때라 책을 펼쳤을 때 한 번에 문장이 눈에 스르륵 잡히면 그 자리에서 한 권은 뚝딱 다 읽고 일어나는 날이 많았다. 그날도 카페에서 한 권을 모두 읽은 뒤, 요가를 가기 위해서 집으로 가려는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나올 땐 '감사합니다'정도의 한마디만 주고받으면 되는 사장님과 나 사이에 갑자기 말도 안 되는 대화가 끼어들었다.


- 혹시 요가하세요?

- 네..?(내가 요가하는 것처럼 보이나? 전혀 그런 모습은 없는데) 네.

- 아 요가 선생님이 우리 카페 단골이신데, 아까 보시고 우리 수강생인 것 같다고 음료 부탁하셨어요.

- 네..? 아. 감사합니다.


 당황한 상태로 음료를 들고는 집으로 가서 요가 갈 채비를 하고 요가원으로 향했다. 선생님한테 인사를 하니 딱히 나는 그런 일을 벌린적 없다는 듯 조용했다. 선생님이 아닌가? 하는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혹시 선생님 커피 맞으시죠?" 하니 그제야 맞다고 말한다.


- 카페 단골인데, 민정 씨 같아서 부탁했어요. 책 좋아하시나 봐요?

- 네. 갑자기 요가하냐고 물어보셔서 당황했어요.

- 책 읽는데 너무 집중하고 계셔서 굳이 말 안 하고 왔어요.

- 아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굳이 우리가 카페에서 눈을 마주친 것도 아닌데 조용히 내 독서 시간을 지켜주면서 음료까지 주다니? 아니 이런 조용한 다정은 또 무슨 일인가. 그날의 요가는 몸을 쭉쭉 늘여 한껏 이완됐기도 했지만, 마음까지 다정으로 들어차 긴장감 하나도 없이 몸과 마음 모두가 노곤 노곤한 상태가 됐다.


 요즘도 세상이 아주 건조하고 팍팍하게 느껴질 때면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나의 다정한 이들을 꺼내어 생각한다.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로부터 마음에 생채기가 여러 번 날 때, 얼른 그 다정한 이들의 얼굴이든 목소리든 행동이든 뭐든 가장 빨리 꺼낼 수 있는 것들로 꺼내어 처방한다. 그러면 아주 차가워졌던 마음이 따뜻한 온기를 찾는다. 그렇게 뭐 잘한 거 없이 살아온 나한테도 대가 없이 이렇게 다정한 이들이 다가왔듯 누구에게나 그 다정한 이들은 온다. 다만 다정한 이들을 알아차리기 위해 나에게 자그마한 다정의 씨앗 정도는 준비해둬야 한다. 그래야 그 다정한 이들이 왔을 때 다정을 틔울 수 있으니까. 


다정은 분명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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