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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혜 Oct 30. 2022

사과의 말은 해방의 언어이다.

누가 외롭다고 하면, “우리는 원래 혼자 태어나고 혼자 죽는 외로운 존재야.”라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원래 인생이 그런 거니 힘들어하지 말라는 위로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는 낳아준 엄마와 함께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보살핌을 받다가 죽는다. 그리고 태어나고 죽는 사이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산다. 


나 같은 사람하고 가 아니라, 나하고 다른 사람하고 관계를 맺느라 끊임없이 서로에게 험한 말을 하고, 상처를 주지만 말이다. 그러지 않으려고 아무리 노력한들 상처를 안 주기도, 상처를 안 받기도 불가능하다. 다행히 우리는 사과와 용서와 회복의 리추얼이 인간관계의 기본으로 자리 잡혀 있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들이 무리 지어 사는 사회에서 이 리추얼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아무도 살기 싫은 사회가 될 것이다.

사과를 받고 싶은 사람의 마음에는, 화가 나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지만, 더 큰 마음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과를 하지 않으니, “왜 사과 안 해?”라고 따지기도 하고, 그 때문에 싸움이 크게 번지기도 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왜 너는 안 미안해?”라고 물을 때, 나는 상대방이 미안하다고 하기를 바랐다. 사과를 하면 상대방을 용서하고, 이전처럼 친하게 지낼 텐데, 대신 “네가 잘못했잖아!”라는 화살을 쏟아서 당황한 나는 상대방하고 단절을 선언했다. 


그리고 도대체 ‘미안함’이 뭐길래 이렇게 관계를 흔들어 놓는지 너무 궁금해졌다. 그래서 미안함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는데, 이 탐구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나는 정말 미안하다고 했나? 책임을 졌나? 온 마음으로 미안해했나?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니 무척 부끄러워진다.

이 글을 쓰느라 읽고 참고했던 많은 책들과 논문과 기사들 중에서 특히 감동적이었던 글은 Marie Rowland라는 호주의 심리학자가 쓴 “사과의 힘”이라는 글이다. Rowland는 “사과는 수치심의 고백이 아니라 사랑의 행동이다”라고 썼다. 사과의 힘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호주 원주민에 대한 두 수상의 반응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1993년에 취임한 John Howard 수상은 호주 원주민에게 사과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이 세대가 전 세대에 한 일에 대하여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는 공감이 전혀 없었고, 세대 간 전수가 되어 재앙과 같이 퍼진 트라우마가 있는 상황에서 그의 사과가 원주민들에게 치유를 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그다음에 수상 자리를 이은 Kevin Rudd 수상은 달랐다. 2007년 선거에서 그는 원주민에 대한 사과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고, 2008년 2월 13일, 단 400자로 된 사과문을 낭독했다. 짧은 글이었지만, 이 사과는 호주 원주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눈물을 흘렸고, 이 상황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깊게 울렸다. 이것은 마음을 울리는 진심 어린 사과였다. 이 사과의 가장 큰 힘은, 고통과 해를 끼친 것에 대한 인정과 사과가 있었다는 점이다. 호주 원주민들은 마침내 이 땅의 가장 높은 권력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고, 자신의 고통을 보았다고 느꼈다. “

이 글을 읽고 Kevin Ruddt 수상의 사과 연설을 찾아서 읽고 영상을 보았는데, 감동적이었다. 비굴하지 않고, 딱딱하지 않고, 존중 어린 사과였다. 책임에 대한 논의와 미래에 대한 약속이 뒷부분에 있지만,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앞부분에 나오는 호주 원주민들이 고통을 겪었으며, 그리고 우리가 그 고통을 초래했다는 인정이었다.

“우리의 의회와 정부들이 만든 법과 정책으로 우리의 원주민 형제자매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을 주었고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는 괴로움을 겪게 한 것에 대하여 사과합니다.
특히 호주 원주민들과 토레스 해협 제도의 아이들을 그들을 가족과 커뮤니티와 부족으로부터 떼어낸 것에 대하여 사과합니다.
이 빼앗긴 세대들(the Stolen Generations)과 그들의 자손들과 그 가족들이 겪은 아픔과 고통과 상처에 대하여, 우리가 미안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자매, 가족과 커뮤니티를 떼어내고 파괴한 것에 대하여, 우리가 미안합니다.
또한 이 자랑스러운 사람들과 자랑스러운 문화에게 저지른 수모와 비하에 대하여, 우리가 미안합니다.

- 2008년 2월 13일 당시 호주 수상이었던 Kevin Rudd 가 의외해서 읽은 사과문에서


Marie Rowland는 “미안합니다”라는 이 간단한 말이, 진심에서 우러난다면, 자신의 행동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의 삶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수치심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행동이며, 나의 행동으로 고통을 입은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한다. 또한, 미안하다고 말은 그 잘못을 저지른 자신을 용서하고 해방시키는, 스스로에게 주는 큰 선물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나는 <싸움의 기술: 모든 싸움은 사랑 이야기다>라는 책을 썼다. 상담을 하면서 들은 사랑하는 사람들하고의 갈등에 대하여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내 삶에서의 갈등 이야기가 섞여 들어가면서 괴롭고도 치유적인 글쓰기가 되었다. 이 책은 제목 때문에 오해를 받고는 하는데, 싸움에서 이기는 기술은 한 줄도 없고, 싸움을 어떻게 잘 바라보고, 어떻게 정정당당한 싸움을 통해서 싸움을 일으킨 갈등을 넘어설 것인가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안 싸우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비겁하게 싸웠던 많은 일들을 기억나서 이 책을 마무리할 때쯤이면, 나와 싸왔던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사죄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어 괴로웠다. 그런데, 미안함에 대한 이 글들을 쓰면서도 비슷한 마음이 든다. 


나에게 피해를 입히고도 사과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억울함이 이 탐구를 시작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너는 왜 미안하다고 안 하니?”라는 질문이 “나는 왜 제대로 미안하다고 못했을까?”라는 질문이 되고 우리는 왜 이렇게 사과하고 책임지기가 어려운지로 질문이 옮겨갔다.

최근에 친구와 크게 싸운 일이 있다. 성격은 다르지만 끈기와 집념의 강도가 비슷한 동갑내기 동성 친구인 우리는 작고 크게 투닥거리지만, 이번에는 정말 크게 싸웠다. 소리치면서 싸운 것은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앉아 있다가 내가 먼저 벌떡 일어났다. 몸속에 불이 확 일어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친구를 비난하는 언어로 소리를 질렀고,  내 친구도 벌떡 일어나서 같이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 그렇게 못된 말을 뿜어내고 씩씩대며 집에 왔는데, ‘아,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한 상황이라고 직감했다. 이번에는 진짜 험한 말을 해버려서, 친구가 용서해줄 것 같지 않았다. 주워 담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고, 정말 이대로 끝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겁이 났다. 다음날 정성을 들여서 4페이지 분량의 사과편지를 썼다. 사실 사과편지의 내용이 다 진심은 아니었다. 내가 잘못했다고 썼지만, 내가 다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친구도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닌 위험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의 잘못을 주저리주저리 썼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편지를 가지고 친구한테 갔는데, 친구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친구가 문을 안 열어주면 어떻게 하지 걱정했는데, 친구가 반갑게 맞이해줬다. 친구도 내가 다시 안 올까 봐 걱정했다고 했다. 나는 편지를 써왔다고 하고 무릎을 꿇고 (그러자 친구도 무릎을 꿇고) 편지를 읽었다. 그런데, 편지를 읽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편지에 쓴 모든 말이, 쓸 때는 다 진심이 아니었는데, 내 입에서 나올 때는 100% 1000% 진심이 되어 나왔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내 친구도 눈물을 흘리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나를 안아주었고, 우리는 회복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은, 무슨 일 때문에 싸웠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점이다. 싸웠다는 팩트는 기억하지만 싸웠을 때의 감정이 사라졌고 왜 싸웠는지를 모르겠다. 게다가 이전에 투닥거리던 마음도 가져갔는지, 친구를 보면 웃음만 난다. 해방이 된 것 같다.






참고 문헌:
Marie Rowland, “The Power of Apology” Wellbeing, Issue 19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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