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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혜 Oct 30. 2022

가끔은 때찌때찌가 필요해

미안함과 사과에 대한 글을 쓰면서, 사과를 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는다. 살면서 사과를 하고 사과를 받을 일이 이렇게나 많은데, 사과에 대한 아무런 훈련 없이 이 험난하고 복잡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왜 우리는 이런 것을 학교에서도 집에서 배우지 못했을까?

이 글들은 사과를 어떻게 할까에 대하여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사과를 안 하는 사람이 왜 사과를 안 하는지 이해하고 싶기도 했다. 이 탐구를 시작하기 전에 나의 솔직한 마음은 사과를 못하는 사람은 그냥 나쁜 사람이었다. 그런데, 탐구를 하면 할수록, 나의 비사과(unapology)의 사건들이 떠오르고,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사과의 어려움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또한 사과를 못 받아서 억울해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억울함이 쌓이고 쌓여서, 보복과 응징이 만들어내는 폭력과 억울함의 싸이클을 뉴스에서 매일 본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과 사과를 더 잘하는 사람이 되자고 손잡고 다짐을 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싶지만, 또 한 편으로는 우리가 앞으로 사과를 받지 못하여 괴로운 일들이 앞으로 많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슬픈 마음도 든다. 그리고 이 슬픈 마음속에서 생각나는 다정한 말이 있다. 바로 “때찌때찌”다.

때찌때찌는 할머니와 엄마가 해준 것이었다. 어렸을 때 뾰족한 것을 맨발로 밟아서 발이 아플 때, 넘어져서 마루에 머리를 찌었을 때, 할머니와 엄마는 왜 조심하지 않았냐고 야단치는 대신, 때찌때찌를 해줬다.


"아이고, 누가 우리 공주님 아프게 했어?"
"이 마루가 그랬어? 마루 때찌때찌!"

할머니에게 배우고 엄마에게 배워서 나도 때찌때찌를 한다. 한 번은 조카가 꼬맹이였을 때, 아장아장 걷다가 넘어지면서 이마를 상의 모서리에 꽤 심하게 쿵 하고 박았다. 그때 나는 아이의 아픔을 풀어줄 두 가지 마법의 행위를 했다. 하나는 이마에 “호”를 해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때찌때찌”를 해주는 것이다.

“때찌때찌. 누가 우리 예쁜 찐이 머리 박았어! 나쁜 상 모서리 같으니! 때찌때찌!”
그러자 얼굴을 찡그리며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의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내 무릎에 앉아서 같이 핑구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그리고 나중에 이마의 멍이 뭐냐고 묻는 자기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상이 때렸어. 고모나 때찌때찌 해줬어.”

친한 친구가 억울한 일이 있었다고 하면 제일 먼저 이런 말이 내 입에서 나온다. “누가 그랬어! 누가 우리 친구 괴롭혔어!” 상황은 뒤로 하고 먼저 때찌때찌를 해주고 싶다. 그리고 내가 속상한 일이 있어서 친구에게 속상한 일이 있다고 할 때마다 “누가 그랬어!”라고 물어준 친구가 있다. 진짜 누가 그랬냐고 묻는 것이 아님을 말투에서 안다.


때찌때찌의 말투에는 사랑이 묻어있다. 무조건적으로 너의 편이라는 뜻이 포함이 되어있다. 마루 바닥이던 구름이던 운명이던 우연이던 다 때찌때찌 해주겠다는 의지가 포함이 되어있다. 그리고 친구가 그 마법의 말을 해주면, 마음이 스르륵 풀어지고는 했다.

어른이 되면서 상이 나를 때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잘못해서 내가 피해를 입었다면, 사과를 받고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런데도, 아직도 상이 나를 때린 건지, 내가 상을 때린 건지 모르겠는 상황들이 많다. 어쩌면 같이 때린 것 일 수도 있고, 같이 넘어진 거 같기도 하고,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는 상황들이 많다.

피해를 입고 쓰러져 있는 나는 누군가를 벌주 고도 싶고, 복수도 하고 싶고, 고소도 하고 싶지만, 누구를 탓할지를 모르겠다. 또는 탓할 사람이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는 상황들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엉뚱한 것을 붙잡고, 너가 잘못했잖아! 라며 목을 비틀기도 해서 억울한 사람을 한 명에서 둘로 늘리기도 한다. 또는 내가 다 잘못한 거라며 넘어져있는 자기 자신을 때리기도 한다. 그런데 어떻게 때찌때찌는 인과관계도 잘못되었고, 상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죄를 인정하는 것도 아닌데, 왜 바로 마음이 풀릴까?

살다 보면, 내 책임은 아니지만, 너의 책임도 아닌 일들이 있다. 상황 탓인 경우도 있고, 우리가 함께 초래한 일인 경우도 있고, 좋은 의도가 어긋나서 불행한 상황을 만드는 경우도 있고, 어쩌다 보니 그냥 그렇게 된 경우도 있다. 그럴 때, 이것을 나의 책임이라고 볼지, 또는 그냥 우연한 사고였다고 볼지에 따라 살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불행한 일들에 대한 대처법이 달라진다.


모든 것이 너의 탓이라고 생각하면, 쓰러진 나는 너가 또는 누군가 일으켜 세워줘야 해방이 될 것 같다. 모든 것이 나의 탓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계속 넘어질 것 같다.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은 내 탓이 아니지만,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많은 부분이 나에게 달렸다. 어렸을 때는 “때찌때찌”가 마법의 언어였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다른 마법의 언어가 필요했고, 그리고 다음 문장이 어른이 되어 선택한 나의 마법의 언어이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이 내 탓은 아니지만, 그 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할머니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주가 아프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고, 이쁜 얼굴 찡그리지 않고
방긋방긋 웃기를, 행복하기를, 사랑으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 말을 읊어보자.

“그 일이 내 탓은 아니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들은 내 책임이다.”

즉, 밥에 있는 돌을 씹은 것은 내 탓이 아니고, 돌을 넣은 것도 내 책임이 아니지만, 돌을 뱉어내는 것은 나의 몫이며, 그다음에 슬퍼하고 애도할지, 화를 내며 '여기 사장 나와!'를 할지, 박차고 일어나서  다시는 안 들어갈지의 결정이 내 책임이다.

불행한 일이 나에게 벌어져서 바닥에 쓰러져 있을 때, 사과를 받지 못해 억울해서 땅을 치고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삶은 내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상대방이 사과를 해주던 안 해 주던,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 그다음 발길을 정할 수 있다. 그 일이 내 탓은 아니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내 책임이다. 그래야 사과를 주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내 삶의 결정권을, 내 삶을 이끌어갈 힘을 되찾아 온다.

그리고 가끔은, 어른인 우리도 때찌때찌가 필요하다. 때찌때찌는 죄 없는 무엇을 탓하는 것 이전에, 할머니와 엄마의 사랑이고 마법이었음을, 따뜻하고 찡하게,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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