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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혜 Oct 30. 2022

"미안해"는 어쩌면 휴먼 그루밍일지도

며칠 집을 비우고 돌아왔더니, 같이 사는 고양이인 다홍이가 다가와서 정성스레 비빈다. 그리고 내 손에 자기 머리와 코를 집어넣으며 부비부비 한다. 수염과 얼굴을 잘 쓸어주고, 두 손으로 고양이의 목을 시원하게 긁어준다. 보드랍고 복슬복슬한 장모 고양이인 다홍이의 배를 만지는 것을 좋아하지만, 배를 만지는데 허락되는 시간은 불과 몇 초. 곧 몸을 비틀어 내 품에서 빠져나간다.

추운 겨울, 털이 긴 밍크 이불을 덮고, 친구랑 불편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심장이 점점 콩당콩당 하고 몸에 긴장이 올라오는데, 눈은 왜 자꾸 밍크 이불의 꽃무늬를 세상 처음 본 것처럼 열심히 보게 되는지, 또 왜 나의 손은 이불의 털을 집중해서 쓰다듬고 있는지.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제야 정신을 차리니, 내가 이불의 털을 손으로 몇 가닥 뽑고 있다.

다른 날, 다른 친구가 나한테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친구 옷에 붙은 머리카락이 너무 떼고 싶어서 뗐는데 친구가 화를 냈다. “아니 너 지금 내 말 안 듣고, 왜 딴청을 부리는 거야? 지금 머리카락이 중요해?!” 그러게. 머리카락이 중요할까 안 중요할까?

드라마에서 연예가 막 시작이 될락 말락 할 때 자주 나오는 장면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얼굴이나 몸에 있는 머리카락이나 속눈썹을 떼어 주는 장면이다. 얼마 전에 인기가 많았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얼굴에 붙은 속눈썹을 떼주는 장면에서 심먹할 뻔했다. 속눈썹을 떼주기 위해서는 얼굴이 가까이 가서 일수도 있지만, 혹시 몸이나 옷에 붙은 털을 떼주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행위는 아닐까? 침팬지나 고릴라들처럼?

인간의 DNA는 고릴라와 약 97.7%, 침팬지와 보노보와는 약 98.4% 일치하는데, 이들은 무리 생활을 하고, 많은 시간을 서로의 털을 골라주는 그루밍을 하는데 보낸다. 필요한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이를 제거해 주는 목표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동물행동학자들은 말한다. 겔라다개코원숭이의 경우, 깨어있는 시간 중 1%만 그루밍에 써도 될 것인데, 깨어 있는 시간의 17%를 그루밍을 서로에게 해준다고 한다. 


그루밍은 몸에서 벌레나 이물질을 떼어 주는 것이 기본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떼주는 것보다, 떼주는 척을 훨씬 더 많이 하며, 서열이 낮은 개체가 서열이 더 높은 개체에게 더 많이 해준다. 특히 암컷들끼리 싸우고 나면 서로에게 그루밍을 더 많이 한다고 한다.

침팬지는 자신을 그루밍 해준 친구와 음식을 나눠먹을 확률이 그렇지 않은 친구보다 높다. 그리고 그루밍은 갈등 후에 긴장을 릴랙스 시키는 용도로 쓰인다. 한 관찰연구에서는 두 수컷이 싸우다가 싸움이 교착상태가 되었을 때, 암컷이 와서 수컷 둘에게 차례차례 그루밍을 해주면서 긴장을 완화시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루밍은 기분이 좋아지는 호르몬인 엔돌핀을 분출하게 하며, 심박수를 줄이고, 긴장을 내리는 효과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그루밍이 꼭 필요해서 하는 것이 아니면, 이 행동의 메시지는 뭘까? “우리 이제 괜찮지?”가 아닐까? 관계를 유지하고, 또 갈등이 있은 후에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리추얼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가까운 이와 갈등 상황에서 당황하고 초조해하면서 손으로 뭔가를 뜯거나 벗기거나 쓰다듬는 것도, 내가 챔팬지와 비슷해서 하는 행동이지 아닐까?

“미안해”라는 말이 책임에 대한 무거운 선언일 때도 있고, 책임이 따라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친구들끼리의 가벼운 부딪침이 있을 때의 “미안해”와 “나도 미안해”는 휴먼 그루밍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연구자들은 유인원들의 그루밍에 해당하는 행동이 인간에게는 수다라고 한다. 서로의 유대감을 확인하고 지속하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등을 맞기는 행동 습성이, 사람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것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침팬지들이 필요 이상으로 서로의 털을 골라주는 것만큼, 인간은 필요 이상의 잡담을 한다. 그리고 침팬지들이 실제로 이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이를 잡아주는 모션을 취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이 하는 잡담의 내용은 영양가가 대부분 없다. 대부분 까먹고, 대부분 별생각 없이 말한다. (물론 그러다가 가끔은 싸우기도 하고 화를 입기도 하지만 말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 에렉투스 같은 여섯 종이 넘는 다른 인류 종을 누르고 지배 종이 된 이유는 힘이 더 세거나 빨라서가 아니라, 유연해진 언어 능력으로 세상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허구를 생산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렇게 유연해진 언어능력으로 무엇을 했냐면, 뒷담화와 수다를 떨었다. 수다는 소문을 내고, “우리”라는 아이덴티티를 만들고, 사회적 협력을 발달시켰다는 것이다. (사피엔스, 47)

다음은 캐나다에 사는 이민 2세인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다. 그 친구는 모국어가 영어여서 언어장벽이 없고, 좋은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좋은 회사에서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일을 잘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이 회사에서 높은 자리까지는 올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 이유로 다른 아시아계 이민자의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임원들과 농담 섞인 잡담을 못 하는 것이 이유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가부장적인 한국 아버지와 농담을 해본 적이 없어서, 회사의 간부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농담도 재밌는 수다도 안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회의실에서 나와서 사람들이 하는 대부분의 대화가 잡담이고, 잡담을 통해서 사람들은 교류한다.

국제 행사나 컨퍼런스에 가서 한국 사람들과 외국 사람들, 특히 영미권 사람들이 어울리는 것을 보면, 이 잡담 능력에서 큰 차이가 난다. 한국 사람들은 공식적인 발표나 토론은 잘하는데, 밥을 먹거나 커피타임을 할 때, 스몰 토크, 즉 수다를 못 떤다. 이것은 영어 실력과는 상관이 없다. 아무리 대단한 학자들이나 대표들이라도, 아마 대통령들을 모아놔도, 공식 발표 자리를 벗어나서 밥 먹으며 커피 마시며 하는 이야기는 위대하고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 시시콜콜한 이야기일 것이다. 침대가 얼마나 푹신한지, 비행기 기내식이 얼마나 맛없었는지, 정 할 말이 없으면 날씨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이런 대화에서 한국 사람들이 말이 없어진다. 대부분 권위 있는 사람들과 가볍게 핑퐁을 왔다 갔다 하는 잡담, 수다, 농담의 경험이 별로 없는 것이다. 위에 있는 사람이 (별로 안 웃기는) 농담을 하고, 아래 있는 사람들이 다 같이 웃거나, 그 집단의 개그 담당이 대표로 만담을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지, 수직적인 농담이 오고 가는 것은 평등한 친구 관계를 떠나서는 잘 보지 못한다.

이런 잡담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주고받음 자체가 유대감을 형성하는 요소이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 또한 이런 주고받음을 통해서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 정말 꾹꾹 눌러 담은 미안함과 사무치게 고맙다는 말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쏘리와 땡큐는 인간의 소통에서 유대감을 만들고, 결속력을 다져주며, 우리가 함께라는 느낌을 준다. “우리 괜찮지?” 이런 느낌 말이다. 


우리는 서로의 심장을 스크래치 내기도 하지만, 등을 토닥토닥 해주기도 하고, 가슴을 쓸어주기도 하고, 털을 골라 이를 잡아주기도 하고, 이를 잡아주는 척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미안해.”

그러고 보니, 미안하다고 자주 말하는 친구 한 명은 “미안해~”라고 할 때, 두 손의 손가락으로 나의 한쪽 어깨와 팔을 살짝 긁는 습관이 있다. 너도 나처럼 그루밍하는 침팬지였구나!





참고 문헌


Frans B. M.de Waal, “Primates--A Natural Heritage of Conflict Resolution,“ Science

https://www.science.org/doi/abs/10.1126/science.289.5479.586


Goldman J, “From Monkeys to Humans, Grooming is an Important Way to Win Favours and Earn Social Standing,” BBC

https://www.bbc.com/future/article/20131014-the-touching-moments-we-all-need


Dunbar R, Grooming, Gossip and the Evolution of Languag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6)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김영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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