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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송 Nov 17. 2023

과일바구니에 담긴 행복

   점차 낮아지는 태양의 고도와 함께 가을은 깊어가고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황금물결이 일렁이던 논의 벼들은 다 베어지고 이젠 벼 그루터기들만 남았다. 간간이 참새 무리들이 벼논에 내려앉아 벼이삭을 줍고 있다.

   아침 공기를 쐬려고 창문을 열자, 옆집의 기름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온다.  홀몸이 되어 고적(孤寂)하게 지낸 지 40년이 넘은 할머니가 썰렁해진 날씨에 보일러 가동을 시작한 것 같다. 한 숨의 불기둥이  온도계의 수은주 막대를 조금 밀어 올릴지는 모르지만, 뼛속까지 파고드는 외로움을 녹여주진 못하리라. 2남 2녀의 적지 않은 자식을 두었건만, 사시사철 홀로 지내야만 하는 할머니의 텅 빈 가슴은 한겨울의 하늘처럼 공허하다.

   대나무숲 사이로 얼굴을 디민 태양이 서서히 옆집 창문을 비추기 시작한다. 아침 햇살은 부자의 저택뿐만 아니라 양로원의 유리창에도 밝고 따스하게 비치는 법이다. 햇빛 속의 에너지는 옆 집 깊숙이 스며들어, 집 안과 할머니의 휑한 가슴에 온기를 부여할 것이다.  

   차츰 강해진 햇빛에 아침 이슬이 걷힐 무렵, 작업복을 차려입고 텃밭으로 나섰다. 오늘은 김장용 무, 배추밭의 해충 방제 작업이 날 기다리고 있다. 어제 미리 준비해 놓았던 자리공(장록이라고도 한다)과 은행잎 우린 물을 분무기에 부은 다음, 열 배 정도의 수돗물을 추가하여 천연살충제를 만들었다. 말이 살충제이지, 벌레를 죽이지는 못하고 쫓아내기만 하는 일종의 해충기피제이다. 온갖 농약에 내성이 생겨 독해진 독충들이 이 정도의 천연 물질에 방제될 것 같으면 농약회사들이 존재할 리 만무한 것이다.

   갈수록 진화하는 병해충 때문에 농약 없이 농사짓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특히 농업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일반 농민들의 경우, 경작면적이 넓고 경작하는 농작물의 양도 많아, 병충해 방제는 농약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요즘에는 독성과 부작용이 적은 친환경 농약들이 많이 보급되고 있어서 농약의 피해를 많이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농민은 수확 2주 전부터는 농약 살포를 금지하는 등 방제기준을 준수하고, 소비자는 농산물에 대한 철저한 세척을 실행하면 농약의 부작용에 대한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가족이 먹을 만큼만 경작한다는 나의 농정철학(農政哲學)에 따라, 무, 배추도 각각 여남은 포기밖에 심지 않았다. 몇 평 되지 않은 경작면적이기에, 나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 농법을 실행하고 있다. 부드러운 배춧잎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배추벌레나 진딧물의 접근을 차단하려면 수시로 해충기피제를 뿌려야 한다. 세상일에는 공짜가 없듯이, 안전한 먹거리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상응하는 노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배추는 자라면서 잎과 줄기가 안으로 오그라들면서 공처럼 둥글어지는데, 이러한 생태적(態的) 현상을 결구(結球)라 한다. 만약 결구배추 속으로 배추벌레가 들어가 버리면, 아무리 자주 농약을 살포해도 벌레의 몸에 닿을 수 없기 때문, 배추벌레가 생기기 전에 미리 방제를 해야 하는 것이다.   

   달그락거리는 분무기 소리에 옆집 창문이 열리더니 할머니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2층으로부터 흘러 내려온다.   

  

     “배추벌레가 있나?”


   나는 분무기의 작동을 멈추고, 할머니의 귀가 어둡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벌레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자기 밭의 배추가 걱정되는지 한숨 쉬며 말했다.   

  

     “우리 배추는 괜찮은 지 모르겠네”     


   나이 많은 할머니들에게 가장 어려운 농촌 일과 중의 하나가 농약 방제이다. 수많은 농약 중에 각종 병해충을 방지하고 치료하는 농약을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찾아낸 농약의 용법과 용량을 알아내기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알고 있기에, 텃밭 작물에 대한 해충 방제 작업을 할 때면 해충기피제를 여유 있게 만들어서 할머니의 농작물에도 수시로 뿌려주곤 했다. 오늘도 우리 밭의 작업이 끝나자마자, 인접한 할머니의 배추밭으로 가서 분무기에 남은 용액을 몽땅 살포하였다.

   창가에 서서 나의 행동을 보고 있던 할머니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한마디 던진다.


  “아이고, 고마워라, 수고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웃으로 살고 있는 할머니도 어느덧 팔순이 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농사일을 거뜬히 하던 분이, 요즘은 부쩍 쇠약해져 밭일을 하는 모습을 보기 어려워졌다.

   영국의 시인  드라이든(John Dryden)이  인생은

여행이고 죽음은 그 종점이라고 했듯이,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의  말처럼,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깊은 잠과 아름다운 꿈을 갈망하는 존재가 인간이기도 하다.

   두 집 채소밭의 해충기피제 살포작업은 30분 만에 끝났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샤워를 마친 후 점심 식사를 위해 집을 나서는데, 단감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계단에 놓여 있다. 그리 힘들지도 않은 나의 방제 작업에 마음이 쓰인 옆집 할머니가 가져다 놓은 것이리라. 바구니에는 단순한 과일뿐만 아니라 한 꾸러미의 정(情)도 담겨있다.  이 정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관념적(觀念的) 개념이지만, 인간사회밝고 윤택하게 해 준다.



  가을 하늘이 높고  푸르다. 옆집 할머니의 과일바구니에서 오늘도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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