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송 Nov 10. 2023

고난과 역경은 인간을 단단하게 만든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집 앞의 감나무에는 가을 햇살을 머금은 감이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건너편 산기슭의 배나무 밭에는 아직까지도 수확하지 않은 배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배 품종 중에서도 만생종(晩生種)인 신고배이다. 추석 무렵에 출하해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는 대다수의 배나무 농장주들과는 달리, 이 과수원의 주인은 신고배는 서리를 맞혀야 제맛이 든다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신고배의 진정한 맛을 몇 푼의 돈과 바꾸지 않겠다는, 요즘 보기 드문 원칙주의자이다. 이러한 농부의 장인정신(匠人情神)은, 배가 필요할 때 내가 이 배밭을 찾게 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농정일기(農政日記)에 의하면, 오늘은 마늘을 파종해야 하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이미 각오하고 있었건만, 막상 이 일정을 실행에 옮기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경운기나 관리기 같은 농기계의 도움 없이, 오로지 한 사람의 근력에만 의존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간밤 늦도록 까 두었던 마늘을 챙겨 현관문을 나섰다. 마늘 까는 작업도 보통 일이 아니다. 텃밭에 드문드문 나 있는 잡초를 긁어내고 퇴비를 뿌렸다. 그런 다음, 삼지창(槍)을 ㄱ자 형태로 구부린 쇠스랑이라는 농기구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맑고 건조한 가을 날씨 속에서 단단해진 텃밭의 흙은, 자기의 속살을 파고드는 쇠스랑의 세 가닥 발을 거부하듯이 튕겨낸다. 이 일이 결코 쉬울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비 내린 후 물렁해진 토질이면 보다 작업이 용이할 거라는 바람은, 요즘같이 고온건조한 기상상황에서는 한낮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두어 평 남짓한 밭을 파서 뒤집고, 흙덩이를 깨부수는 업무에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다소 서늘한 오전이라고 하지만, 예년보다 따듯한 날씨에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잠시 땀을 식힌 후, 호미로 이랑을 만들고 씨마늘을 정성스럽게 심은 다음 보드라운 흙으로 덮었다. 수돗물에 포함된 화학물질이 마늘에 유해할 것 같아, 미리 받아 두었던 빗물을 흙 위에 흠뻑 뿌렸다. 가뭄과 냉해를 방지하기 위해, 마늘밭에 왕겨를 두둑이 덮는 작업을 마지막으로 올해의 마늘심기 일과는 끝났다.



    대부분의 농작물이 봄에 파종하여 가을에 수확하는 것과 달리, 마늘은 가을에 파종하여 다음 해 여름에 수확한다. 이 작물은 노지(露地)에서 겨울을 나야 하는 월동작물(越冬作物)인 것이다. 대개 10월 중순에 파종한 마늘은 보름 정도 지나면 싹이 올라오고, 날씨가 그리 춥지 않은 12월 중순까지 천천히 성장한다. 그러다가 기온이 떨어지는 한겨울이 되면 성장을 멈춘 채 겨울을 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식물들이 혹한을 피해 씨앗으로 겨울을 나거나, 줄기 혹은 잎을 떨쳐버린 채 뿌리만으로 땅속에서 한겨울의 추위를 피해 가지만, 마늘은 맨몸으로 당당히 겨울 추위에 맞선다. 이 식물은 영하 10도가 넘는 강추위 속에서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裸身)으로 꿋꿋이 겨울을 버텨 낸다. 이에 비하면, 따뜻한 온돌방에서 두꺼운 이불을 덮고 겨울을 보내야 하는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추운 겨울, 마늘의 줄기는 꽁꽁 얼어 얼음 막대기처럼 차갑고 단단하다. 이는 생명이 있는 생명체라기보다 나무 꼬챙이나 쇠붙이에 가깝다.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지면 이런 차가운 얼음덩어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이러한 현상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한겨울의 추위를 이겨 내는 마늘의 몸에는 자신을 보호하고,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강력한 성분들이 생성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과학적으로 검증해 보아야 하겠지만, 이들에게는 다른 농작물에는 없는 어떤 신비한 물질이 존재할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이러한 나의 합리적 추론을 반영하듯, 미국 타임(Time) 지는 마늘을 세계 10대 건강식품으로 선정하고 있다. 마늘 속의 알리신은 강력한 살균·항균 작용을 하고, 소화를 돕고 면역력을 높이며,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춘다고 한다. 마늘이 정력이나 원기를 보(補)하는 강장제라는 것은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알려져 왔다. 이 농작물은 단군신화에도 등장함으로써 우리 민족에게도 신성시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마늘의 강인한 생명력은 혹독한 환경을 딛고 일어선 인간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고난과 역경은 인간을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법이다. 사람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삶을 살아가는 지혜와 인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농작물들은 몸소 가르쳐 주고 있는 듯하다.

    예상보다는 빨리, 점심시간 무렵에 마늘심기 작업은 끝이 났다. 산등성이를 넘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이마의 땀방울을 씻어준다. 그동안 마음 한 구석에 부담으로 남아있던 이 작업을 끝냈다는 성취감이 소소한 행복으로 다가온다.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에, 다른 동료보다 약간의 음식을 더 받는 행운을 누리고,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갔다는 평범한 사실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아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었다.

이전 01화 행복의 미학(美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