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가 끝나 휑하니 빈 들판은 황량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이맘때면 농촌 마을도 적막함을 견디지 못해 긴 겨울잠에 들어간다. 집 앞 텃밭의 농작물도 대부분 수확되었고, 그 자리는 전지(剪枝) 된 소나무 가지들을 덮어 두었다. 솔잎이 썩으면 퇴비가 되거니와, 햇빛을 차단해 잡초 발생을 억제하는 이른바 멀칭(mulching)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다.
텃밭 귀퉁이에 자리 잡은 손바닥 만한 마늘밭에서는 두어 달 전에 파종한 마늘이 제법 큼지막하게 싹을 틔웠다. 온통 갈색으로 변한 세상 속에서 이 작물만이 푸르름을 발산하여 한겨울의 삭막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있다.
겨울이 오면 시골보다는 도시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등, 나의 생활 패턴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긴다. 이 계절이 되면 농촌에서는 별일도 없거니와, 단열이 잘 되지 않는 단독주택에서 겨울을 나려면 추위에 떨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전기보일러 온도를 높이면 그럭저럭 겨울을 날 수 있으나 전기요금 폭탄을 각오해야 한다.
나 같은 촌놈에게 도회지에서의 생활은 농촌에 비하면 지루하고 따분하다. 삭막한 도심에서는 농작물이 자라는 광경도 볼 수 없고, 텃밭 가꾸기와 같은 소일거리도 없기 때문이다. 올 2월에 정년퇴임을 하였지만 아직까지 강의는 계속하고 있어, 그나마 도시 생활의 무료함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다. 12월 중순이면 그 강의마저 종강하여 기나긴 겨울방학에 들어간다.
추운 겨울에는 주로 독서와 글쓰기로 시간을 보낸다. 은퇴한 사람들에게는 이 두 가지가 가장 보편적인 여가활동이라 할 수 있다. 글의 소재(素材)는 주로 시골에서 얻기에, 내 글은 농촌 생활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다. 글 쓰는 행위 역시 시골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도시에서 쓰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업무를 수행할 때, 특별히 작업능률이 오르는 시간이나 장소가 있다. 대학입시에 사활을 걸던 고교 시절을 예로 들면, 시간대는 방과 후 초저녁, 장소로는 학교 도서관에서의 학습능률이 제일 높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주로 여름철에 일거리가 몰리는 시골집 텃밭 농사의 경우, 새벽 동트기 전의 작업이 가장 효율적이다. 일단 해가 뜨고 나면 찌는 듯한 무더위와 줄줄 흐르는 땀으로 인해 작업능률이 반감되기 때문이다.
글 쓰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옛 성현들은 물 맑고 경치 좋은 곳에 정자(亭子)나 누각(樓閣)을 짓고 그곳에서 시를 읊고 풍경을 노래했다.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일컬어지는 부벽루나 영남루, 촉석루가 모두 경관이 수려한 강변에 위치해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런 곳에서는 시상(詩想)이 절로 떠오르고, 문장(文章)이 술술 풀릴 것 같다.
글을 잘 써 보겠다고 이런 건축물 속으로 들어갔다가는 문화재관리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집중력을 요하는 글쓰기 속성상, 번잡한 도심에서 마땅한 글쓰기 장소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도시인들은 주로 카페나 커피숍에서 글을 쓰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우리 세대들에게 이곳은 적절한 장소가 아니다. 더구나 조용한 시골집에서 글을 쓰는 것이 익숙해진 나에게, 산만하고 복잡한 도심의 이런 유흥시설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적절한 독서와 글쓰기 장소를 찾은 것은 나에게는 일종의 행운이었다. 우리 아파트 38층에 위치한 독서실이 그것이다. 뒤로는 해운대 해수욕장이 펼쳐져 있고, 옆으로는 오륙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씨에는 대마도도 선명히 볼 수 있다. 게다가 30여 좌석을 갖춘 독서실의 이용자는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아파트 어느 집에서든 이런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니 이곳까지 올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내 개인 서재인 셈이다. 나에게 이곳은 현대판 부벽루요, 도심 속의 영남루이다.
오늘 이곳에서 글감 하나를 건지고 글 한 편을 완성했다. 쓰는 장소가 바뀌니 글 소재도 바뀌었고 문장 스타일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글쓰기에 있어서 변화와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셈이다. 날씨 추운 겨울철에는 이곳을 자주 이용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