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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송 May 17. 2024

봄에 심는 희망의 씨앗

  경칩이 지난 산기슭에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전지(剪枝)라는 명목으로 사지를 절단당한 채, 시골집 앞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매화나무는 하얀 꽃망울을 터트렸다. 겨우내 하늘을 뒤덮었던 칙칙한 구름은 물러나고 맑고 따스한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창공을 가로지르는 참새들의 날갯짓도 한결 경쾌하다. 바람의 방향도 북풍에서 남풍으로 바뀌었다. 남쪽 산등성이를 넘어 불어오는 가벼운 바람에 입고 있던 두꺼운 겉옷이 무겁게 느껴진다. 봄은 사람들의 옷매무새까지 바꿔 놓는 마법사 같다. 겨울이 무겁고 검은 망토를 걸친 마귀할멈이라면, 봄은 화려하고 산뜻한 박사(薄紗) 치마저고리고 치장한 처녀 같은 모습이다.

   오늘은 집 앞 텃밭에 아욱과 근대를 파종하는 날이다. 이번에 심은 씨앗들은 점차 자라나서 앞으로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 줄 것이다. 가난과 배고픔으로 점철된 유년 시절, 이 채소는 여름철의 주된 찬거리였다. 어머니는 끼니마다 아욱 이파리를 밥 위에 쪄서 쌈을 준비하고, 근대 줄기로 된장국을 만들었다. 쇠고기는커녕 돼지고기조차 맛보기 힘들었던 그 시절에는 매일 먹어야만 하는 이 음식들이 그리도 싫었다. 빈곤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찡그린 얼굴로 밥상에 앉아 반찬 투정을 하는 아들이 야속하기만 했을 것이다.

   먹거리가 부족하여 깡마른 체구에 영양실조를 걱정해야 했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비만으로 인한 성인병을 걱정해야 하는 초로(初老)의 늙은이로 변모하였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달콤하고 기름진 산해진미에 싫증이 난 미각세포는 이젠 담백하고 순수한 맛을 갈구(渴求)하고 있다. 화려한 꽃이나 강렬한 향수에는 쉽게 싫증이 나는 법이다. 채근담(菜根譚)에 의하면 "진한 술과 기름진 고기, 맵거나 단 것은 진정한 맛이 아니다. 진정한 맛은 다만 담백할 따름이다 “라고 하며 음식의 참맛을 제시하고 있다. 아욱쌈과 근대 된장국의 건강하고 담백한 맛과 이들 음식에 대한 추억이 나로 하여금 오늘날 아욱과 근대를 심도록 유혹한 것이다.

   텃밭에 퇴비를 뿌린 후 괭이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두어 평 남짓한 밭을 파서 뒤집고 흙덩이를 깨부수는 작업에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아직 냉기 조각들이 겨울의 잔해인 양 군데군데 포진하고 있는데이마에는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잠시 땀을 식힌 후 호미로 이랑을 만들고 아욱과 근대 씨앗을 정성스럽게 심었다. 미리 받아 두었던 빗물을 물조리개로 이랑 위에 흠뻑 뿌린 다음, 냉해 방지를 위해 비닐을 덮는 작업을 마지막으로 두 농작물에 대한 파종작업은 끝이 났다.


  

    아욱의 씨앗은 구형(球形)의 형태에 매끄러운 표면을 가지고 있다. 좁쌀처럼 조그만 이 물체가 싹을 틔운 후 햇빛을 받아 어린이 키만큼 자라난다. 이는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이다. 근대 종자는 아욱보다는 크고 표면에 울퉁불퉁한 돌기가 솟아 있는 모습이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를 연상하게 한다.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역병이 일진광풍처럼 몰아쳤던 대지에도 봄은 오고 있다. 전 세계를 휩쓸었던 이 바이러스는 인류 문화의 가장 보편적인 가치인 인간관계마저 단절시켰고, 생존의 기본 요건인 경제활동도 위축시켰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조그만 바이러스에도 맥을 추지 못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몇 년 전부터 우리가 겪어 왔던 이러한 재난은 풍요로워진 물질문명 속에서 육체적으로 나약해지고 정신적으로 교만해진 현대인들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염병으로 황폐해진 대지에 생명의  씨앗을 심는다. 우리 조상들의  삶의  궤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인류는 자기 앞을 가로막는 난관이나 장애물을 극복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심은 종자들은 단순한 농작물이 아니라, 내일은 우리 사회가 보다 발전하고 건강하리라는 희망의 씨앗이다. 비록 우리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 땅에 출몰했지만, 본인의 인생은 각자가 만들어 가야 한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열심히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월간에세이 202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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