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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대기업에서 짤렸다.

사람은 대비를 해야 해

by 찬란


그 날, 수퍼맨이 잘렸다.



“회사에서…잘렸다고요?“

”원래…임원은 그래. 임시 직원이지.“

”어떻게 해…우리 라임이 이제 중학교 들어가는데…“

아버지는 대기업 임원이었다. 양복을 잘 차려입고 아침마다 어머니의 배웅을 받고 출근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수퍼맨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항상 바빴고 지쳐있었다. 주말에도 주로 집에서 잠을 자거나 골프 약속이 있다며 새벽부터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술을 그만하라며 잔소리를 하면서도 콩나물 국을 끓여 내왔다.


아버지는 간간히 회사에서 새로 맡았다는 신사업 이야기를 하곤 했다. 중국으로 자주 출장도 다녀왔다. 그 때 처음으로 국화차를 마셨다. 뜨거운 물 속에서 천천히 벌어지는 꽃잎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신사업이 잘 안되었다고 했다. 아버지 얼굴의 주름이 깊어질수록 우리 집의 웃음도 줄어들었다. 아버지 회사는 원래 의류 사업이 메인이었다. 신사업 담당 임원이었던 아버지는 정수기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다. 사업이 지지부진하던 중 뉴스에서는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회사들의 줄도산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엄마, ‘도산’이 뭐야?”

“음…도산은…회사가 문을 닫는거야.”

“왜 문을 닫아?”

“글쎄…어려워져서 그런 걸까…”

“아빠가 가셔서 회사 문 열어주면 되는거 아니야?”

“음…그러게…”

IMF 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았다.

시나브로 불황은 우리의 사회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실직했다.



아버지의 실직 이후 세간살이가 간소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빨리 변한 건 밥상이었다. 장어와 소고기가 올라오던 밥상이 돼지 뽈살로, 그 다음엔 계란과 두부로 바뀌었다. 예전처럼 맘껏 먹을 수 없었다. 한참 클 때였던 나는 먹고 싶은 게 많았다.

그래도 시무룩했던 아버지가 기운을 되찾기를 바랬다. 아버지는 퇴직 직후에 비해 조금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IMF가 끝날 것이니 재취직을 시작해 보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근심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보, 저번에 면접 본 건 어떻게 됐어?”

“글쎄, 연락이 없네...“

​​

​​아버지의 재취직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와중 아버지는 3,000만원으로 주식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집안 분위기는 더 가라앉았다. 우리는 방 한 개를 포기했다. 할아버지 집과 가까운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다퉜다.

“우리 돈 어떡해? 어떡하냐고?”

”나 좀 믿고 기다려봐! 좀!“

나는 도망가 있을 어딘가가 필요했다. 주로 게임이었다. 임진록에 푹 빠져서 하루종일 마우스와 컴퓨터를 붙들고 살았다. 가끔 집이 너무 시끄러우면 내가 향한 곳은 독서실이었다. 독서실은 낮에도 껌껌했다. 처음에는 만화책을 잔뜩 빌려와 잔뜩 읽었다. 동네 만화대여점들을 섭렵했다. 무협지에도 푹 빠졌다. 나의 최애는 ‘묵향’이었다. 차원이동물이었다. 무협지를 읽으며 주인공이 드래곤과 만나는 장면을 읽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갔다. 밖에도 독서실 안처럼 깜깜해질 때 쯤 베낭을 매고 나왔다.

“우리 아들 라임이, 공부 많이 했어?”

“어? 어…”​​

나는 돈의 무서움을 일찍 알게 되었다. 집에 돈이 있으면 어머니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웃어주었다. 행복했던 우리 가정에 그늘을 드리운 건 돈이었다. 돈만 있으면, 돈이 많으면 어머니는 예전처럼 나에게 다시 웃어줄텐데. 아버지도 껄껄 웃으면서 엄마가 만든 찌개에 대해 품평할텐데.


“넌 아무 생각 하지 마. 공부나 열심히 해.”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나에게 필요한 과외나 학원비는 아낌없이 지불해 주었다. 돈이 문제인데, 나에게 이렇게 돈을 쓰면 안 되는 거 아닐까. 나한테 쓰는 엄마 아빠의 돈 때문에 엄마가 더 힘든 건 아닐까? 가끔 어머니는 자고 있는 내 얼굴을 만지며 울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흐느끼는 것도 본 적이 있었다. 동생 때문이었다.

동생은 아기였을 때 부터 아팠다. 돌 지나고 열성 경련이 왔다. 급히 응급실로 갔지만 이미 뇌손상이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동생과 평생을 병원을 전전하며 살았다. 조금이라도 부작용이 덜하고 발작을 일으키지 않는 약을 찾느라 계속 병원을 바꿨다. 동생은 평생 아기로 살게 될 것이다.

내가 공부를 해야 해.

그래서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 해.

마음을 먹게 된 날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명절에 대학에 간 삼촌에게서 받은 엠씨스퀘어를 꺼냈다. 귀에 꽂고 뚜 뚜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공부를 하면 집중이 더 잘 된다고 했다. 들고 다니던 무협지와 만화책이 ‘수학의 정석’과 ‘성문 영어’로 바뀌었다. 뒤쳐진 공부를 뒤쫓느라 두 학년 및 교과서부터 다시 봐야 했다.

공부가 재미있었다.

“어머…너가 라임이구나? 우리 애가 그러는데, 이번에 20등이나 올랐다며?”

“안녕하세요. 아줌마.”

“비결이 뭐니? 혹시 어느 학원 다녀? 과외 선생님은 어머니께서 구하셨니?”

친구 엄마들이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 끼니도 거르고 문제집을 풀었다. 닥치는 대로 문제집을 사서 풀고 또 풀었다. 연필로 정리하고 지우개로 지운 후 다시 쓰는 버릇 덕에 내 방은 항상 지우개 가루로 한가득이었다. 시험을 볼 때마다 등수가 올랐다. 등수가 오르니 공부의 재미에 가속도가 붙었다. 게임하듯 몰두하기 시작했다.

전교 2등을 한 성적표를 집에 가져간 날,

내가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교에 합격한 날

어머니는 울었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IMF는 지나갈거야. 한국은 다시 일어날거야. 지금은 저점 매수의 시기야.”


그리고 아버지는 옳았다.

IMF 이후 코스피가 미친 듯 상승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아버지의 주식으로 일어서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주식 투자가 성공한 이후 우리 집 형편은 드라마틱하게 나아졌다.





“엄마, 나 대기업 합격했어. 2월에 신입사원 교육 받으러 오래.”

“세상에…우리 라임이가…해 냈구나.”

어머니가 눈물이 글썽거리는 걸 보니 머쓱했다. 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어머니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부자가 같이 술 한 잔 하자며 찬장에서 양주병을 하나 꺼냈다. 어머니는 작은 유리컵 두 잔을 식탁에 올려놓고 파인애플 통조림을 따서 유리그릇에 담았다.


“안주가 없어 어떡하니! 가서 뭐라도 좀 사올게.“


어머니가 장을 보러 나갔다. 약간 뻘쭘했지만 좋기도 했다. 의자에 쑥쓰럽게 앉아 있는데 ​아버지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처음이었다.

“아들, 아버지는 너가 자랑스럽다.”

“네. 아버지…”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아버지가 머뭇거렸다.

“잊지 마. 항상 사람은 대비를 해 놔야 한다.”

“무슨 대비요?”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벌면…그걸 잘 투자해 놔야 해. 사람은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나도 내가 대기업에서 하루 아침에 그만두게 될 지 몰랐다.“

”네…“

”잊지 마. 라임아, 사람은 대비를 해 놔야 해…“

”네 아버지.“

”이번에 우리 가족을 위해서..집도 하나 더 마련하려고 하잖니.“

”집이요?“

”그래, 성수동에…지역주택조합이라고 있는데..잘만 되면 엄청날거야…넌 몰라도 된다…“

오랫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지 아버지는 금방 취했다. 어머니가 장을 보고 돌아오기도 전에 아버지는 졸리다며 안방에 들어갔다. 잠시 후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혼자서 양주잔을 바라보며 파인애플을 입에 넣었다.

그래, 사람은 대비를 해 놔야 해.

그런데, 어떻게 대비를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돈이야 돈.

나를 지켜주는 건. 나를 받쳐주는 건.

나를 안전하게 해 주는 건.

아픈 내 동생을 지켜주고,

어머니 아버지를 웃게 하는 건.


...

돈이야.


...



그때는 몰랐다.

성수동 지역주택조합이 우리 가족에게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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