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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에서 까이고 부동산을 찾아갔다

연봉, 주소, 자차

by 찬란


“라임씨, 혹시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아, 아뇨! 없습니다 차장님.”

“내가 건너 건너 아는 분이 있는데, 혹시 소개팅 생각 있을까 해서.”

“소개팅이요??”

대기업 입사 후 예상보다 소개팅이 자주 들어왔다. 대학교 동창을 통해 들어오기도 하고 친척들을 통해 들어오기도 했다. 심지어는, 회사 동료들을 통해서도 들어왔다. 대기업 사원증이 소개팅 시장에서 쫌 먹히는 모양이었다. 어깨가 으쓱했다.

그런데…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라임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예, 과일석유화학에 다니신다고요?”

“네, 맞습니다.”

“거긴 연봉이 얼마나 되나요? 꽤 높죠?”

훅 들어오는 연봉 질문부터…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자차 가지고 있나요?)”

“아, 저 지하철 타고 왔습니다.”

“어머 그래요? 어느 역에서 오셨어요? (집이 어디인가요?)”

“예, 응암역이요.”

“아……”

대부분의 소개팅은 연봉, 자차, 집주소 3단 콤보 공개가 끝나면 급격히 열기가 식었다. 내 목에 걸려있던 대기업 사원증이 초라하게 흔들거렸다. 소개팅녀들은 급한 일이 생겼다며 허겁지겁 자리를 뜨거나, 혹은 말 없이 눈 앞의 음식에 집중하고는 했다. 나는 미지근해진 열기에 당황해 주절거리다가 말실수를 연발했고, 분위기는 더 타이타닉처럼 가라앉고는 했다.


“엄마, 회사가 강남역이라 다니기가 너무 멀어.”

“에고, 아무래도 그렇지? 그래도 어떡하니.”

“아니…한 번 그 근처에 오피스텔이라도 알아볼까봐.”

어머니의 눈치를 슬쩍 보며 떠 본 질문에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강남역 근처 오피스텔이면 월세가 비싸지 않을까?“

”뭐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한 번 알아나 보지 뭐.“

소개팅에서 다섯 번 째 까이자 약간의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이래 뵈도 난 매일 미라클 모닝을 하면서 자기계발 중인 대기업 사원이야. 그 근처 월세가 얼마이기에? 한 번 알아나 보지 뭐.


약속 없는 주말. 회사 근처를 산책하다가 찜해 둔 부동산을 찾아갔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화초에 물을 주고 있었다. 내가 벨소리를 딸랑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매우 반색했다.

”실은, 제가 이 근처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요.“

괜히 목에 힘 한 번 줬다.

”아이고 젊은 분이 대단하십니다. 이 근처에서 월세 찾으시는가요?“

”예, 맞습니다.“

”잠시만요, 제가 마실 거라도 한 잔 드리겠습니다, 손님.“

깍듯하게 할아버지가 뒤돌아서 작은 냉장고 문을 열며 뒤적거렸다. 사장님은 차가운 매실주스 캔음료를 나에게 건넸다. 왠지 어른이 다 된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았다.

”이 근방에서 월세 구하려면 시세가 어떻게 되나요?“

”글쎄, 물건마다 천차 만별이지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돋보기 안경을 들어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확정일자 못 받는 물건은 어려우신가요?“

”네? 어어…“

내가 머뭇거리자 할아버지가 다른 음료수도 꺼내 주겠다며 몸을 돌렸다. 사장님의 등을 향해 나는 질문했다.

”그런데 사장님, 확정일자가…뭔가요?“

냉장고를 뒤적거리던 사장님이 순간 정지했다.

다시 나를 향해 뒤돌아본 사장님의 눈빛이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사장님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손님, 앞으로 가실 길이 많으시겠어요…“

​​

그 날, 그 사장님을 만난 건 참으로 천운이었다.

그 날 내가 덜 운이 좋았더라면 나는 큰 실수를 했을지도, 또는 잘못된 선택을 했을 지도 모른다.

“왜 이런 건 학교 수업에서도, 드라마에서도 나오지 않는 걸까.”​

부동산을 나왔다. 머리를 긁적이며 걷기 시작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아는 선배였다.

“라임아, 난데. 너 혹시 지금 강남역 쪽이냐?“

”어 맞는데요, 왜요 형?“

”너 소개팅 해 볼 생각 있냐? 나 아는 동생이 강남역 근처라는데 너 생각이 나서.”

여섯 번째 소개팅이었다.

“어…그러죠 뭐. 강남역 어디로 가면 돼요?”

이것도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무언가였다.


여섯 번째 그녀는 나에게 집 주소도 연봉도 자차 여부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내 이야기를 쭉 듣고 나더니 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셨구나, 확정일자 별 것 아니에요. 전월세 계약할 때 꼭 받아야 한다는 것만 알면 돼요.“

”아 네네, 오면서 안그래도 검색해 봤어요…하하.“

”우리 다음엔 부동산 무료 세미나 같이 갈래요?“

우와 훅 들어온다.

“무료 세미나요?”

“네, 근처 맛집도 가고,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아, 네. 그렇죠…”

“그리고 라임씨, 그냥 이건 제 생각인데요…”

“네네.”

“지금은 부모님 댁 있는데 굳이 오피스텔 구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 돈 아껴서 차곡차곡 모으세요.“

그 순간 깨달았다.

오늘부터 나의 행운의 숫자는 세븐이 아니라 식스라는 걸.

눈 앞의 그녀를 꽉 잡아야 한다.

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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