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17
괴롭고, 죽을 것 같아도 그게 끝은 아니었다.
내 인생은, 더 다채롭고, 아름다운 드라마가 되었다.
가해자의 부당징계청구가 기각되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는 대학병원에 계속 가야 했다. 정신건강학과에서 각종 검사와 진료를 받았다. 대학병원 교수님은
수많은 피해자들을 봐 온 분이었다.
“매우 전형적인 가해자의 모습이네요,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풀배터리 테스트, 심리검사는 네 시간 정도 이어졌다.
IQ 테스트, 나무, 집 그리기, 로호샤흐 검사
그리고 사건에 대한 긴 대화.
“남자를 한 명 그려보세요.”
나는 젊고 생기 넘치는 고등학생을 그렸다. 남학생은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검사자가 물었다.
“이 아이는 누구인가요?”
“우리 아들이 크면 이렇게 될 거에요.”
“이 아이의 소원은 뭔가요?”
“엄마가 안 아픈 것요.”
한 달 뒤, 심리평가결과서가 나왔다.
“우수한 내적 자원을 가지고 있으나
현재 겪는 깊은 고통으로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
결과서를 읽는 것은 힘들었지만 나를 들여다 보는 기회가 되었다.
“나 많이 힘들었구나, 그래도 잘 하고 있어.“
그리고 회사가 가해자에 들볶여 나를 보호하지 않고 손 떼겠다고 한 이상, 나도 결심했다.
“나도 내 할 일을 망설이지 않고 해야겠다.“
회사를 상대할 때마다 내가 신세를 졌던 동료들, 여러 즐거웠던 에피소드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했었다. 회사는 나의 그런 ‘정’ 때문에 망설이는 마음을 이용하여 침묵을 요구하고 있었다. 일을 편하게 마무리하고 조용히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걸 깨닫게 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도 건조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했다. 그래서 산재 신청을 준비하기 위해 병원과 노무사 사무실을 오갔다. 필요한 서류를 모으고, 신청서와 재해발생경위서를 새로 작성했다. 또다시, 또 처음부터 그날의 일을 꺼내 적기 시작했다.
한편, 재판은 느리고 지리하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양측 변호사는 계속 의견서를 제출했다.
주변 사람들은 엄벌 요청하는 탄원서를 써주었다. 나는, 그 종이들을 들고 또 한참을 오래도록 누워 있었다.
거절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합의는 없다. 오직 엄벌만을 바란다.“
모두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랑과 마음이, 내가 밑바닥에서 조금씩 조금씩 걸어올라오는데 붙잡아 주는 손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킥스에 들어가 내 사건조회를 했다.
새로운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가해자가 추가로 새로운 변호사를 선임했다. 선임계가, 형사사법포털에 올라와 있었다.
나는 변호사 이름을 검색해 봤다. 네이버에 사진과 약력이 나오고, 나무위키에 그의 페이지가 있었다.
그는 나무위키에 등재되어 있던 거물중 거물이었다. 작년에 갓 퇴직한 검사 고위직 출신, 검찰총장 최종 후보. 유명한 전관변호사였다. 법조계에서는 ‘이기는 쪽’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전관 포함한 여러 변호사와 로펌들이 그의 방어를 위해 포진해 있었다.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 때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었다. 거대한 무력감과 절망감이 나를 삼켜버렸다.
“너무 괴롭다.
이 고통을 끝내고 싶다.
그냥 끝내버리자.“
현기증이 일었다. 뭐에 씌인 것처럼 쓰러졌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한참 후 정신을 차려보니 방바닥이었다.
“아..다행이다.“
조금 정신을 차렸다.
“이런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 줄 수는 없어.”
두통이 일 정도로 이를 깨물었다.
내일은 분명히 좀 더 나아질거야.
조금만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길거야.
이 고통도 언젠가는 반드시 끝날거야.
오늘 하루만, 하루만 버텨보자.
뭘 좀 먹어야 했다.
—
내 생각은 옳았다. 좋은 일은 정말로 일어났고,
고통은 끝이 있었다.
그날 하루를 잘 버텨낸 나에게 너무나 고맙다.
이후 마음이 힘들면 주문처럼 외웠다.
—
“One day, you will tell your stroty of how you overcome what you went through,
and it will be someone else’s survival guide.” - Brene Brown
언젠가 당신은 당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의 생존 지침서로 들려줄 것입니다.
—
*처음 이 시리즈를 접하신 분들께*
이 이야기를 실제 사건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1화부터 정주행 추천드립니다.
1화부터 읽기: https://brunch.co.kr/@laylagrace/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