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1
그곳은 조용한 룸이었다.
방 안에 창문은 없었고, 나는 테이블 하나를 마주하고 그와 앉아 있었다. 그가 나에게 텔레그램으로 지시해 오라고 한, 22번 방이었다. 누구도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공간. 그는 문이 보이는 안쪽 자리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는 그 방을 골랐고, 예약하고, 나에게 오라고 했다.
업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나는 전사 기획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내가 맡았던 사업부의 모든 현안을 챙기고, 담당자들과 의논하고, 경영자들에게 보고하는 업무였다. 그저 일에 몰두하며,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일 생각 뿐이었다. 여러 정보, 회사 사정, 업계의 용어와 트렌드, 기술 용어를 섭렵했고 이를 경영진, 그룹 보고실에서 알 수 있도록 깔끔하게 구성, 정리해서 보고하곤 했다.
인정 받는 느낌이 좋았다.
우리는 종종 오가며 업무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그가 내 소속팀장을 만나러 오면 둘은 긴밀히 회의실 안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눴다. 앉아 있던 우리들은 눈치를 보며 메신저로 ‘이번엔 무슨 일이래?’ 라고 숙덕였다. 온갖 상상을 펼치며 메신저에서 우리는 깔깔댔다. 우리 팀장과 한참을 뭔가 의논하고는, 그는 회의실을 나와, 내 어깨를 슬쩍 잡고는 본인의 사무실로 가곤 했다.
나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나 보다.
나는 그가 할 중요한 업무 이야기를 속으로 짐작하며 불편한 술자리를 견뎌내고 있었다. 그가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는 고위 간부이니 만큼, 나를 이렇게 단독으로 불러냈다면 뭔가 이유가 있을 테였다. 그 이유를 아까부터 골똘히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사실, 단둘이 룸에서 만나자고 한 것도 이상했다.
그리고 내가 메신저로,
“직속팀장에게 얘기하고 나가도 될까요?“
물었을 때,
극구 만류한 것도 뭔가 이상했다.
그러나 그는 대기업에서 높은 직급의 중요한 업무를 맡은 고위 간부였다. 모두가 그를 보며 어려워하고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어쨌거나, 나도 그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파워를 가진 사람에게 호감을 산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일잘러의 조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과도하게 높은 텐션으로 그의 말을 경청하고, 술을 따르고, 웃으며 호응하고 있었다.
한참 술을 마시던 그는 말 끝을 길게 늘이며 나에게 할 조언이 있다고 했다.
“너가 대기업 여성 팀장이 되고 싶다면” - 이라고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너가 업무는 똑부러지게 잘하는데, 대인관계는 좀 더 신경써야 해.”
“좀 더 사람들한테 메신저로 말도 걸고, 다가가야 해.”
한참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고 있자니 점차 부아가 났다. 어째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최근에 너가 누구랑 다퉜다던데 이렇게 해결해라.’ 라고 말했다면 납득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저 추상적인, 교과서 같은 말들이 이어졌다. 내가 아닌 다른 그 누구가 앉아 있다 해도 상관 없을 말들이었다. 너가 사람 관계를 잘 관리해야 한다, 먼저 다가가야 한다. 이런 말들이 반복되었다. 최근에 내가 누군가랑 갈등한 적이 있었나 생각해봤다. 전혀 짐작가는 바가 없었다.
그저 “말을 잘 들어라,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같은 말들이 술잔과 함께 돌림노래처럼 이어졌다.
들을 수록 이상했다. 겨우 이런 말이나 하자고 나를 이런 밀폐된 방에 불러냈다 싶었다.
“생각해 주시는 건 고맙지만 전 이런 업무스타일을 갖고 있어서요.”
웃으며 일어섰다.
할 얘기가 정말 있었다면 진작 했겠지,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 때 그가 말했다.
“너 내가 너가 여자로 보인다고 하면 어떻게 할거냐?”
동시에 그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나보다 17살 많은 유부남이었다.
그날 이후,
매일을 견뎠다. 그냥 시간이 지나가길 바랬다.
그는 그날부터 아주 오랫동안 이어진
내 모든 날들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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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und is the place where the Light enters you.” - Rumi
상처가 있는 곳에 빛이 새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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