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19
나를 성추행한 직장상사는 재판 선고일을 일주일 앞두고 기습적으로 공탁금 천만 원을 걸었다. 그리고 법원을 향해 주장했다.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니 감형해 달라.“
당시 사회적으로도 ‘기습 공탁금’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었다. 피해자가 원하지도 않는 돈을 일방적으로 걸고는, 그걸 근거로 형을 줄여달라는 가해자들. 관련 다큐멘터리와 뉴스 속 많은 이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왜 가해자의 반성과 사죄는 피해자가 아니라 재판장을 향한 것이냐“
“왜 법원이 피해자가 원하지 않은 돈을 근거로 용서를 대신하는가.”
분노가 너울거렸다. 뭐라도 해야 했다.
나는 법원에 낼 엄벌 탄원서를 다시 작성했다.
“저는 단 한 푼도 수령 의사가 없으며 절대로 이 공탁이 판결에 반영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시간이 없었다. 선고일이 며칠 후였다. 이 서류를 법원에 가서 내야 하는데, 아직 나는 서류를 직접 들고 법원에 갈 만한 에너지가 없었다.
그래서 퀵서비스까지 이용해 서류를 법원에 보냈다.
봉투에 ‘엄벌탄원서’라고 대문짝만하게 썼다. 아직 퀵기사님 얼굴을 대면하는 것도 힘들었다. 퀵기사님께 문자를 보내고, 집 대문 앞에 있는 봉투를 법원에 가져다 달라고 했다. 수신지는 서울지방법원 등기국이었다.
잠시 후 퀵기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중요한 서류인 거 같은데, 제가 혹여나 잘못 전달하면 안되니까요...지금 막 전달 완료했습니다. 저, 그...
파이팅 하시길 바랍니다.”
생면부지 퀵기사님에게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그 기사님의 얼굴도 모르지만 그분의 목소리는 한 겹 방어막처럼 나를 포근히 감싸는 것 같았다.
나 때문에 시간을 뺏기신 것 같아 죄송했다.
“퀵비 이만원에 추가로 만원을 더 드리고 싶어요.“
그분은 추가금을 받지 않았다.
나를 붙잡고 지탱해주었다.
이제 선고일까지, 5일 남았다.
하루 하루 악착같이, 피를 말리는 심정으로 이 악물고 버텼다. 그 때 당시의 일기를 다시 들춰보면 약 없이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끼니는 커녕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그리고 그 무렵,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좋은 일이었으면 좋았으련만, 그게 아니었다. 새로이 온 소속팀장이었다. 나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있다.
순간 현기증이 났다. 나는 한참을 침묵했다. 잠시 후, 조용히, 또렷하게 말했다.
“저는 제가 복직하는 시점에, 제 의견을 반영해
인사 발령이 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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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rkest hour has only sixty minutes.” - Morris Mandel
가장 어두운 시간도 단지 60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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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시리즈를 접하신 분들께*
이 시리즈는 실제 사건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1화부터 정주행 추천드립니다.
1화부터 보기 : https://brunch.co.kr/@laylagrace/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