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20
“다른 팀으로 가줬으면 좋겠다.”
소속 팀장은 매우 공손한 어조로 아주 폭력적인 말을 내게 건냈다.
그는 회사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조직의 수장이었다. 대기업 팀장이 팀원에게 존댓말로 친절히 말하고 있으니, 그 정도면 내가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사내 성범죄 피해자에게
소속팀장이 직접 전배를 요구했다.
머릿속에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간 내가 실낱같이 잡고 있었던, 회사가 나에게 했던 말들이 천둥처럼 하나하나 내 귀에 울렸다.
“피해자의 커리어를 보호할테니...”
(인사실장)
“제 명예를 걸고 이 사건은...”
(법무팀장)
“대표이사로서 너무 미안하고 상처받지 않게...”
(CEO)
한참을 침묵했다. 간신히 입을 떼어 대답했다.
“저는 제 의견을 반영해 발령 날 거라 들었습니다.“
“그렇게 회사에서 ‘배려’해 주기로 한 건가?”
“배려가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 순간, 실제로 동공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너무 분노하면 목구멍이 턱 막혀 말이 안 나오는구나, 그걸 그날 알았다. 이를 악물고 다시 물었다.
“저를 전배시키는 게 회사 공식 입장입니까?”
‘회사의 공식 입장’이라는 단어에, 팀장은 아니라고 했다. 당황한 것 같았다. 그저 개인 의견일 뿐이라고 하며 황급히 대화를 종료했다.
그는 가해자가 ‘억울하다’고 호소하며 만들었던 친목 술자리의 주요 멤버였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선고는 그 다음주였다. 선고일은 평일 낮 10시였다.
갈까, 말까
일주일 내내 그 생각만 했던 것 같다.
변호사님은 가지 말라고 했다. 법정이 좁아 가해자와 정면으로 마주칠 가능성이 높고, 내가 졸도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냥…집에서 기다리세요. 선고는 몇 분 안에 끝나요.그게 정신 건강에 더 좋아요.“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결과가 나오면.. 알려주세요.”
선고는 10시. 나는 휴대폰 시계를 붙잡고 계속 기다렸다.
10시 10분.
메시지가 도착했다.
잠시 후 변호사님이 판결문 전체를 보내왔다.
“피고인에 대해서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한다.”
판결문 마지막 페이지.
판결의 이유가 적혀 있었다.
유리한 정상: 피고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동종범죄로 형사처벌 받은 전력이 없다.
피고인은 피해자를 위하여
천만원을 공탁하였다.
불리한 정상: 피고인은 피해자로부터 용서받지 못하였다.
나는 온몸이 덜덜 떨렸다.
사건이 시작된 이후,
나는 한 번도 그에게 사과를 받은 적이 없다.
그는 나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의 인정은 재판부를 향한 것이었다.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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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법정은,
이 사건의 결론을 마지막 줄에 기록했다.
이 한줄의 결론을 놓지 않기 위해
나는 고통받았고,
많은 것들과 싸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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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re stronger than you think, braver than you believe, and more loved than you know.” - A.A.Milne
당신은 생각보다 강하고, 믿는 것보다 용감하며,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이 사랑받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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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시리즈를 접하신 분들께*
이 시리즈는 실제 경험과 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1화부터 정주행 추천드립니다.
1화 보러가기 : https://brunch.co.kr/@laylagrace/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