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21
나를 성추행한 직장상사가 벌금형 유죄판결을 받았다.말로 설명하지 못할 수많은 감정들이 거센 파도처럼 들이닥쳐 나를 붙잡고 질질 끌고 갔다. 이렇게 많은 감정들을 한 번에 느끼면 숨이 막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을 부여잡고 판결문을 읽었다.
그토록 절실하게 탄원했건만 가해자의 공탁금은 여전히 감형에 반영되었다.
변호사님은 조심스럽게 위로했다.
“유죄 판결이 난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어요. 형사재판에서 유죄를 이끌어내는 건 쉽지 않아요. 당초 원했던 금고형은 아니지만, 그동안 잘 버텼고, 잘 싸웠습니다. 이제는 일상 회복을 위해 조금 쉬세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친 나는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쉽게 감정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나는 검사실에 전화를 걸었다. 얼굴 모를 검사실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수많은 사건을 다루고 있겠지만 그는 내 사건을 알고 있었다. 검사실 직원은 한참을 이어진 내 흐느낌을 다 들어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약속했다.
“검사님께 피해자의 목소리를 꼭 전달하겠습니다.”
항소는 일심 판결 후 일주일 안에 제기되어야 한다.
판결 후 사흘 째, 검사실에서 연락이 왔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이는 많았다. 하지만 제도는, 아직 따라오지 못했다. 가슴 속 깊은 분노를 끌어올렸다.
뭔가 해야만 했다.
뭐라도 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노트북을 켰다.
법무부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장관과의 대화’ 라는 코너가 있었다. 그곳에, 접수하기를 눌렀다. 내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형사공탁 제도와 관련하여 피해자의 동의 없는 공탁이 피고인의 양형에 유리하게 반영되지 않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합니다…”
당시, 부산 돌려차기 사건 등으로 성범죄자에 대한 일벌백계 요구가 사회적으로 터져나오던 때였다.
그리고 며칠 후, 법무부에서 답장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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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께서 겪으신 일련의 사건으로 현재 이루 말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겪고 계시는 점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고, 항소심 단계에서라도 귀하의 안타까운 상황이 바로 잡히기를 바랍니다.
반성이나 사과 없는 가해자들에 의해 ‘기습공탁’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피해자 의사와 무관한 감형이 이루어 지는 등 제도 악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피해자분들께서 다시 한번 마음의 상처를 얻고 있는 현실에 대해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귀하의 의견을 심층적으로 검토하고 피해자분들이 두 번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제도개선 방안을 고민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법무부장관 000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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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을 읽으며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내가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나서야 형사사건에서의 ‘공탁제도’의 문제에 대해 알게 되었다.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꼼수 공탁을 걸었을 땐, 이를 양형에 반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건 당연한 얘기였고,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형사공탁법이 개정되며
가해자는 피해자 인적사항 없이
사건번호만으로 공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공탁이 가능해졌다.
내가 피해자였던 강제추행 사건의 일심 판결이 났다.
가해자는 꼼수 공탁으로 감형을 받았다.
나는 법무부에 편지를 보냈다.
‘공탁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해 줄 것을 탄원했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답장을 받았다.
언론에서 다뤄지기 시작했다.
PD수첩 등 여러 유명 프로그램에서도 다루기 시작했다. (PD수첩이 판례를 분석한 결과 전체 공탁 사건 기준 86%가, 성범죄 사건은 75%가 감형받았다.)
더이상 꼼수 공탁금이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된다.
법무부는 보도자료를 냈다.
공탁제도를 악용한 피고인이 부당한 감형을 받는 문제점을 해소하겠다고 했다.
내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내 외침은 그냥 흩어져 휘발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국가기관의 기록 어딘가에 남아 있게 되었다.
나는 그 후 일어난 변화들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나는 지금도 믿는다. 분명, 나의 외침은 이 변화에 일조했다고.
더이상 가해자가 꼼수로 감형받지 않도록,
피해자가 두 번 눈물 흘리는 일이 없도록,
나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시스템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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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not what happened to me. I am what I choose to become.” - Carl Jung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내가 되기로 선택한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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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시리즈를 접하신 분들께*
이 시리즈는 실제 사건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1화부터 정주행을 추천드립니다.
1화 보러 가기 : https://brunch.co.kr/@laylagrace/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