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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판결이 났다. 회사는 재징계를 약속했다.

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23

by 찬란

내 이야기를 담은 기사가

한겨레를 시작으로 세상에 나왔다.


대기업 팀장이 부하직원을 성추행해서

일심 벌금형 유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회사에서 피해자를 되레

전배를 시키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네이버와 다음포털에는 회사 이름과 함께 ‘성추행’이 연관 검색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사가 포털에 걸리자 다른 언론사들도 후속 보도를 내기 시작했다. 여러 언론사에서 해당 내용을 기사화하기 시작했다. 뉴스 유튜브로도 올라오기 시작했다. 앵커는 격앙된 목소리로 해당 뉴스를 전달하고 있었다.


“ESG 경영 시대에 직원 보호를 외면하는 기업의 문제를 드러내며, 이 기업 가치와 신뢰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사내 블라인드 게시판에도 글이 올라왔다. 골든 타임을 놓치지 말고 대응을 잘 해야 한다는 글들이 이어졌다. 수많은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회사가 더 문제다.”

“성범죄자는 즉각 해고해야 한다.”

“피해자가 왜 떠나야 하나?”



기사에 따르면 회사 측은 이렇게 말했다.


“확정 판결이 나오면 최종 징계위원회를 열어

징계 수위를 재결정할 방침입니다.“


전문가들은 말했다.


1심 벌금 800만원이 나올 정도면

다른 기업이라면 해고도 가능한 수위다.”

“사건 후 피해자와 가해자 분리조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에 올라오는 댓글 반응은 그보다 훨씬 격앙되어 있었다. 왜 아직까지도 가해자가 떵떵거리고 잘 지내야 하냐는 성토의 댓글이 이어졌다.


회사와 가해자를 비난하는 댓글들을 보면 솔직히 마음 한 켠이 시원해 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바뀐 것은 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현실은 생각보다 더 느리게 바뀐다는 것을.


회사는 그저 침묵했다. 최종판결이 나와야 한다는 말 뿐이었다. 막연한 짐작이 들었다. 서로 책임소재를 회피하며, 다음 사람이 해결하겠지 - 라고 일을 뒤로 미루는 것 같다는.


그래서 또다시

2심 판결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이, 나는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애썼다.


우울감과 무력감이 가끔씩 썰물처럼 나를 덮치곤 했다. 그저 기다리며 견뎌 냈다. 가슴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답답할 때는 나가서 걷거나 달리기를 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너, 예전보다 얼굴이 밝아진 것 같아.”


조금씩 웃음을 되찾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 날도 생겼다. 아이들과 남편의 나를 향한 사랑은 나를 조금씩 회복시켰다. 낯선 이들의 조용한 선의도 나를 도닥이며 괜찮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조금씩 컨디션이 나아지고 있었다. 내 일을 전혀 모르는 지인들과 웃고 떠들며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



한편, 항소심은 이미 접수되었고 새로운 사건번호가 부여되었지만 5개월 동안 공판기일이 잡히지 않았다.

재판부가 담당한 사건이 너무 많아 공판일을 지정받기까지 1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나에게 도움을 주시던 변호사님이

‘공판기일 지정신청서’를 제출해 주셨다.

“피고인은 진심어린 사과를 한 적이 없습니다. 회사에서는 항소심까지 마무리 되어야 피고인을 최종 징계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는 피해자 입장에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신청서를 접수 후 공판기일은 통보되었다.

몇 개월 뒤였다.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증거나 진술이 필요한 단계가 아니었다. 그러니 의견서 제출할 일도 없었다.


그저, 지리한 기다림만이 남았다.



그리고 마침내,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항소 기각.

원심 유지.

유죄. 벌금 800만원.



쌍방 모두 항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판결은

최종 확정되었다.






“It’s not what happens to you, but how you react to it that matters.” -Epictetus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그 일에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이 시리즈는 실제 사건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1화부터 보시기를 권유드립니다

1화부터 읽기: https://brunch.co.kr/@laylagrace/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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