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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가 한겨레 기사로 나왔다.

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22

by 찬란

검사실에서 연락이 왔다.


항소를 하겠다고 했다.




대기업 고위간부가 위력으로 부하직원을 성추행한 이 사건에, 검찰에서는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최소한 집행유예는 나와야 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가해자가 판결 일주일 전 천만원 공탁금을 넣었고 법원은 이를 양형인자로 받아들여 벌금형을 선고했다.


검찰에서도 가해자의 꼼수 공탁이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감형에 반영된 건 부당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검찰은, 항소를 결정했다.


“형량이 너무 가볍습니다. 항소심에서 다시 다퉈볼겁니다. 어쨌든 유죄로 판결 난 건이니 너무 상심하지 말고, 마음을 잘 추스리세요.“


그 말은 위로였고, 배려였다. 고맙다는 말도 못했다.


형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이 나오자 멈춰 있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모든 일들이 줄줄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형사재판에서의 유죄 판결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을 피해자에 대한 의심을 해소해 준 것이다.


쓴웃음이 나왔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비슷한 시기, 산재인정통지서를 받았다. 산재는 형사 사건에 비해 준비만 잘 하면 마음 쓸 일이 많지 않았다. 기계처럼 서류와 자료들을 정리하고 보완했다. 내 마음의 스위치를 끄고 필요한 일들을 했다. 상담을 도와주던 노무사님은 말했다.


직장 상사의 위력에 의한 성범죄는 당연히 산재로 인정받아야 할 케이스입니다.“


다만, 내 상해는 신체가 아닌 정신적인 것이었기에 그 고통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자료가 필요했다.


병원, 근로복지공단, 교수님, 노무사님…

각자의 위치에서 손을 내밀어 주었다.


재해발생경위서, 산업재해조사표,

최초요양급여신청서,

심리상담결과서, 뇌파검사,

수개월에 걸친 진료기록,

진료비 세부산정내역서, 약제비 정리,

형사사건기록 정리와 제출,

산재보험공단 담당자와의 질의,

공단의 회사조사 요청,

산재심의위원회(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출석요구...


나는 그 도움 속에서 악착같이 버티며 준비했고,

결국 해냈다.

산재보험카드가 도착했다.


내가 업무 중 발생한 사고로 상해를 입었음을

국가에서 인정받았다.

정말 치열했던 검증 끝에 얻어낸 결과였다.



관련된 모든 관계자분들은 나에게 호의적이었고, 최선을 다해 도와주셨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내 케이스를 맡아주신 여러 담당자분들께 감사한 마음 뿐이다.


소소하게 당황스러운 일들도 많았지만,

(회사에서 나의 재해 원인에 “업무 스트레스” 라고

적어 냈다던지 하는)

이 쯤 되는 일은 이제는 씩 웃으며 넘길 정도로 나는 조금씩 회복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조금씩 확신하고 있었다. 그 마음들이, 나를 일으켜 세우고 지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달려갈 힘이 되어주었다. 정말 많은 도움과 지지를 느끼며 이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를 지켜보는 눈도 있고,

응원하는 마음들도 분명히 있다고.

실재한다고.


그 깨달음이, 나를 회복시켜주고 있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걸어 가기 시작했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주저 앉아 있던 나를 단단하게 잡고 버텨 준 것은 남편과 아이들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내가 간신히 비틀대며 일어났을 때, 저 멀리 있는 빛을 향해 안내해주며 큰 목소리로 목청껏 응원해 준 것은, 정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할 수 있어! 우리 같이 가자! 여기 빛을 향해 걸어 보자!”

“너를 응원할게! 넌 혼자가 아니야!”

“이야기를 해줘서 고마워! 넌 대단한 사람이야! 이제 일어나 걸어 보자!”



그 즈음, 민사소송도 시작했다. 가해자를 상대로 한 손해 배상 청구였다.


변호사 수임료를 내고 나면 남는 금액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그래도 싸워야 했다.


그리고 나는, 회사를 향해 일심 판결 내용을 정식 공유했다. 내가 요구한 것은 시종일관 두 가지 뿐이었다.

가해자의 사과와 퇴사였다. 나는 그것 외에 바라는 것이 없었다.


내가 오래 몸 담았던 회사의 동료들을 보호하고, 조직에 경종을 울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었다. 내 후배들, 동료들은 나와 같은 일을 당하지 않아야 했다.


가해자가 받은 정직3개월은 형사 유죄 판결이 내려진 지금, 너무나 가벼운 처분입니다. 반드시 중징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회사는 이를 거부했다. 항소심 최종판결이 나와야 한다고 했다. 어차피 항소는 검찰이 제기한 것이라 무죄가 나올 일은 없었음에도, 회사는 ‘최종판결’이라는 단어를 고집했다. 귀찮은 일을 외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무렵, 한겨레 기자님을 만나게 되었다.


“회사가 성범죄에 대응하는 방식 자체에 문제 제기를 해야 합니다. 충분히 기사화하고, 공론화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겨레 기사가 게재되던 날, 포털 메인에 떴다.

회사 이름도 기사에 함께 실렸다.


“대기업 팀장이 17살 어린 여직원을 성추행하고,

형사재판에서 유죄 벌금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회사는 가해자를 솜방망이 징계한 뒤,

오히려 피해자에게 부서 전배를 강권했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회사 이름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에 ‘성추행’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는 이제,

세상에 퍼졌다.




“Small steps in the right direction can turn out to be the biggest step of your life.” - Anonymous

올바른 방향으로의 작은 한 걸음이, 인생에서 가장 큰 도약이 될 수 있다.



*처음 이 시리즈를 접하시는 분들께*

이 시리즈는 실제 대기업 성추행 사건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1화부터 정주행을 추천드립니다.

1화부터 읽기: https://brunch.co.kr/@laylagrace/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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