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지막회)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24

by 찬란



유죄. 벌금형 800만원.


쌍방 대법원 항소가 없었기에

이 판결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신 검사님과,

항소까지 책임 있게 진행해주신 검사실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나를 성추행한 가해자를 상대로 제기했던 민사소송도 조정절차를 통해 마무리되었다. 내가 청구한 금액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 중 일부를 합의금 형태로 지급받는 조건이었다.


“소액 민사소송에서는 법원이 조정을 권하는 경우가 많아요. 생각해보시고 알려주세요.“


변호사님은 나에게 합의문을 보내주었다. 잘 검토하고 서명을 해달라고 했다.


나는 합의의 전제 조건으로 두 가지를 요구했다.


1. 나와 내 가족 생활반경 안에 접근하지 말 것.

2. 직접이든 제3자를 통하든

어떤 방식으로도 연락하지 말 것


합의문 초안을 살펴봤다.

합의문에는 가해자에게 더이상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합의문 초안 안에는 비밀유지조항도 있었다.


“쌍방은 이 사건 관련 일체의 정보를 발설하거나 유포하지 않는다.”


나는 이 비밀유지조항 삭제를 요구했다.


“비밀유지조항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결국,

내 요청대로

최종 합의문에서 비밀유지조항은 삭제되었다.


그렇게 합의문에는

나를 침묵시킬 수 있는 조항이 사라졌다.


나는 내 이야기를

언제든, 어디서든,

마음껏 말할 수 있게 되었다.



“ 지금은 내가 지치고 힘들어도,

언젠가... 내가 더 좋아지게 되면

내가 겪은 이야기를 말할 수도 있을 거야. “



특히,

나와 비슷한 일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브런치에 이 이야기를 올리고 있는 지금 또 느낀다.

그때 그 결정을 했던 나 자신이,

참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대학병원에 진료를 위해 내원했다. 그간 진료를 봐 주신 교수님은 이제 내가 거의 다 회복되었다고 했다. 교수님 얼굴도 쳐다 보지 못하던 나는 이제 웃으며 내가 받았던 여러 도움에 대해 말씀드리곤 했다. 나는 진료를 받을 때마다 말해왔다.


“교수님, 빨리 단약하고 싶어요.”


몇 달에 걸쳐 조금씩 약을 줄여나가던 어느 날,

교수님이 말했다.


“이제 이 약을 마지막으로 처방할게요. 이번 약을 다 복용하고 나면 이제 병원에 오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단, 부작용이 없다면요,

라고 조심스럽게 덧붙였고, 축하해주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고, 축하드려요.”





나는 마지막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향했다. 햇살이 유난히 눈부셨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과 안도감에 나도 모르게 온몸이 떨렸다. 내 인생의 길고 어두웠던 한 챕터가, 이제 끝난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 지는 몰라도, 나는 아직 살아 있었고,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동안 정말 고생했어.

너, 참 장하다.“



내 어깨를 스스로 탁탁 두드리며, 작게 웃었다.

내가 대견했다.


“이젠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아.

이것도 견뎌냈는데 내가 뭔들 못하겠어.“


후련했다.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치료가 끝났다는 말은, 더 이상 진단서가 발급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번 휴직이 끝나면, 이제 연장도 없네.”



이제, 회사를 떠날 때가 되었다.

싸움은 끝났다.

상처가 남았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이제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떠날 차례였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회는 에필로그로 마무리하겠습니다.






“We can’t help everyone, but everyone can help someone.” -Ronald Reagan

모든 사람을 도울 순 없지만, 누구나 누군가는 도울 수 있습니다.



*처음 이 글을 읽으시는 분께*

이 시리즈는 실제 사건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1화부터 읽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1화부터 읽기: https://brunch.co.kr/@laylagrace/25


keyword
이전 23화최종판결이 났다. 회사는 재징계를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