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24
쌍방 대법원 항소가 없었기에
이 판결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신 검사님과,
항소까지 책임 있게 진행해주신 검사실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
나를 성추행한 가해자를 상대로 제기했던 민사소송도 조정절차를 통해 마무리되었다. 내가 청구한 금액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 중 일부를 합의금 형태로 지급받는 조건이었다.
“소액 민사소송에서는 법원이 조정을 권하는 경우가 많아요. 생각해보시고 알려주세요.“
변호사님은 나에게 합의문을 보내주었다. 잘 검토하고 서명을 해달라고 했다.
나는 합의의 전제 조건으로 두 가지를 요구했다.
1. 나와 내 가족 생활반경 안에 접근하지 말 것.
2. 직접이든 제3자를 통하든
어떤 방식으로도 연락하지 말 것
합의문 초안을 살펴봤다.
합의문에는 가해자에게 더이상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합의문 초안 안에는 비밀유지조항도 있었다.
“쌍방은 이 사건 관련 일체의 정보를 발설하거나 유포하지 않는다.”
나는 이 비밀유지조항 삭제를 요구했다.
“비밀유지조항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결국,
특히,
나와 비슷한 일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브런치에 이 이야기를 올리고 있는 지금 또 느낀다.
그때 그 결정을 했던 나 자신이,
참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대학병원에 진료를 위해 내원했다. 그간 진료를 봐 주신 교수님은 이제 내가 거의 다 회복되었다고 했다. 교수님 얼굴도 쳐다 보지 못하던 나는 이제 웃으며 내가 받았던 여러 도움에 대해 말씀드리곤 했다. 나는 진료를 받을 때마다 말해왔다.
“교수님, 빨리 단약하고 싶어요.”
몇 달에 걸쳐 조금씩 약을 줄여나가던 어느 날,
교수님이 말했다.
“이제 이 약을 마지막으로 처방할게요. 이번 약을 다 복용하고 나면 이제 병원에 오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단, 부작용이 없다면요,
라고 조심스럽게 덧붙였고, 축하해주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고, 축하드려요.”
—
나는 마지막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향했다. 햇살이 유난히 눈부셨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과 안도감에 나도 모르게 온몸이 떨렸다. 내 인생의 길고 어두웠던 한 챕터가, 이제 끝난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 지는 몰라도, 나는 아직 살아 있었고, 더 강해지고 있었다.
내 어깨를 스스로 탁탁 두드리며, 작게 웃었다.
내가 대견했다.
“이젠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아.
이것도 견뎌냈는데 내가 뭔들 못하겠어.“
후련했다.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치료가 끝났다는 말은, 더 이상 진단서가 발급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번 휴직이 끝나면, 이제 연장도 없네.”
이제, 회사를 떠날 때가 되었다.
싸움은 끝났다.
상처가 남았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회는 에필로그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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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can’t help everyone, but everyone can help someone.” -Ronald Reagan
모든 사람을 도울 순 없지만, 누구나 누군가는 도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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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글을 읽으시는 분께*
이 시리즈는 실제 사건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1화부터 읽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1화부터 읽기: https://brunch.co.kr/@laylagrace/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