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18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송사와 법적 분쟁을 조심스럽게 멀리하며 살아간다.
나에게는, 나를 성추행한 직장상사와의 점점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이 법적 싸움이 눈앞에 있었다.
“이제는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
제도적으로는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들이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가해자측에서 제출한 변호인 의견서를 나는 열람할 수 없었다. 기록 열람 복사 신청을 했지만 재판장이 불허했다.
피해자 측이 재판 자료를 열람하는 데는 상당한 제약이 따른다. 반면, 가해자는 방어권 보장을 이유로
모든 기록을 열람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재판이 끝날 때까지도 가해자가 어떤 논리를 펼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가 무슨 주장을 하는지 근거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주장을 반박할 수 조차 없었다.
그는 회사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여전히 ‘억울하다’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전파되고 또 전파되었다. 회사 안에서는 ‘중립론’이 대세가 되었다.
“법원 판결을 지켜보자.”
그는 전관 출신의 유명 변호사를 수임했고, 수천만원의 수임료를 자랑하는 그 변호사가 자신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거라 믿는 듯했다.
회사에 호소해 보았다. 회사는 대답했다.
“가해자가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걸 어떡하냐”
이렇게 이어지는 자잘한 이차가해는 너무나 소소하지만 너무나 많아서 작은 잽으로 하루종일 두들겨 맞는 듯한 고통이 이어졌다.
선고일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해자 측은 합의할 의사가 있느냐고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대답했다.
1. 진정성 있는 사과문을 게시하고
2. 피해자와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지 않는다면
생각해보겠다고.
하지만 그는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도 합의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선고일은 하루 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고일을 딱 일주일 남겨둔 시점에서
킥스(형사사법포탈) 알림이 떴다.
그는 기습적으로 공탁금 천만 원을 법원에 걸었다.
선고 일 주일 전에. 내가 시간에 쫓겨 아무 대응할 수 없도록.
다음과 같이 말하기 위해서였다.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합의를 하려고 했는데 피해자가 응하지 않았다.”
공탁은 진심의 표현이 아닌 전략이다. 법정에서 ‘반성 중’이라는 근거로 활용되는 도구다.
나는 그의 사과도, 그의 퇴직도 이뤄내지 못했다.
다만 공탁금이 법원에 남았다.
그는 그렇게 피해 회복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값으로도 이 사건을 거래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했다간 내 영혼은 산산조각날 것이었다.
—
“In the end, some of your greatest pains become your greatest strengths.” - Drew Barrymore
인생에서 가장 아팠던 순간들이 가장 큰 힘이 되어 돌아옵니다.
—
*처음 이 시리즈를 접하신 분들께*
이 시리즈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1화부터 정주행 추천드립니다.
1화부터 보기 : https://brunch.co.kr/@laylagrace/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