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10
완벽한 물적 증거를 확보했다는 기쁨도 잠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가해자가 자신이 받은 징계인 정직 3개월에 불복했습니다. 너무 과하다고 하네요. 이에 절차대로 인사위원회 재심이 열릴 겁니다. 피해자가 서면으로 대체할 건지, 출석할 건지 알려주세요.“
첫 인사위원회 때는 나는 서면으로 대체했었다.
“이번에는 직접 가겠습니다. 가서 위원회에 누가 앉아 있는지, 도대체 왜 정직 3개월인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나는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재심은 공장에서 열렸다. 서울에서 차를 타고 두 시간은 내려가야 했는데, 내 상태론 도저히 운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버스터미널에서 이리 저리 갈아타고 공장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장거리 택시를 구할 테니 교통편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했다.
재심이 열리는 날, 나는 차를 타고 공장에 내려갔다.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공장 주차장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나는 그와 주차장에서 마주치기라도 할까봐 차 안에서 사무실 입구를 몰래 몰래 보며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었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떨었어?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위로한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피해자가 그렇게 떨고 숨고 두려워 해야 했을까?”
지금도 모르겠다.
가해자의 진술이 내 앞차례였기에, 나는 그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차에서 내려, 사무실 여자화장실로 달려들어갔다. 볼일을 보고 나와 화장실 거울 앞에 서 있는데, 공포감이 들었다.
“여기에서 주차된 차에 걸어갈 때 도중에 가해자를 만나면 어떡하지??”
생각만으로도 졸도할 것 같았다. 도저히 무서워 화장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인사팀 담당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여자화장실에 숨어 있을테니 내 차례가 되고 가해자와 마주치지 않게 될 때 알려주세요.”
삼십분을 여자화장실 안에서 덜덜 떨며 기다렸다. 그곳은 가해자가 들어올 수 없는 유일한 장소였다.
잠시 후, 연락을 받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임원들로 구성된 인사위원회가 내 눈앞에 있었다. 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나는 기획실에 근무했기에 그 임원들 중 대부분과 친분이 있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나는 그들과 업무 이야기를 하고 회의를 하며 메일을 주고받았었다.
임원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좋아하고 인정해 주었던 임원이었다. 그는 서울에 출장 올 때마다 나에게 차 한 잔 하자고 할 만큼 나를 아꼈던 임원이었다. 한 번은 서울사무소에서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 내 자리에까지 직접 찾아와 인사해주었다. 나는 반갑고 놀란 마음에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내 소속팀장은 놀리곤 했다.
“00과장이 아주 인기가 많네.”
그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임원과도 눈이 마주쳤다. 항상 격려해 주고 내가 하던 보고를 칭찬해 주던 임원이었다. 과묵한 편이라 모두가 어려워 하는 임원이었다. 그러나 내가 만든 보고자료를 몇 번 모두 앞에서 칭찬한 적이 있었다. 그는 다른 동료에게 나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보고자료는 00과장처럼 만들어야 해.”
그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나에게 격려의 눈빛을 보낸다고 생각했다. 적대적이지 않았다. 적어도 경찰조사 보다는 할 만할 거라고 생각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임원들과 나눴던 업무 관련 대화가 떠올랐다. 그것이 나에게 너무나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서글퍼져 시작하기도 전에 눈물이 글썽여졌다.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안내를 받아 의자에 앉았다. 내 머릿속에 다시 회사의 말들이 종소리처럼 울렸다. 인사실장은 내게 말했었다.
“피해자의 커리어를 보호………”
모두가 자리에 앉자, 위원회장은 말했다.
“차분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시면 됩니다. 이차 가해 우려가 있으니 추가 질문은 지양할 겁니다. 원하는 말을 하고 싶은 만큼 하십시오.“
그래서 준비해 간 서면을 꺼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읽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울음이 터졌지만 끝까지 읽어 냈다. 그 날 있었던 일들, 이후 그의 협박과 회유,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지키고 싶은 커리어를 읽어내려갔다.
준비해 온 서면을 다 읽고 나자 회의장에 지독하게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나가도 좋습니다.”
비틀대며 밖으로 나왔다.
좀 자고 싶었다.
한참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스럽게도 기사님은 뒷자리에서 계속 눈물을 흘리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뭐라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하루 종일 물 한모금 먹지 못했다. 그 때 법무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재심 결과가 나왔고요... 회사는 원심의 정직 3개월을 유지하기로 했습니다...이제 회사의 징계 절차는 끝났습니다. 형사 고소에서 건투를 빕니다.“
괜히 센 척, 나는 호기를 부리며 말했다.
“네, 제가 보내버리고 돌아갈게요.”
법무팀장은 크게 웃었다.
좀 자고 싶었다. 일단은 뭘 좀 먹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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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 adversity, every failure, every hearache carries with it the seed of an equal or greater benefit.” - Napoleon Hill
모든 고통과 실패는
나에게 더 큰 행복의 씨앗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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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시리즈를 접하신 분들께*
이 시리즈는 실제 사건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1화부터 정주행 추천드려요.
1화부터 읽기: https://brunch.co.kr/@laylagrace/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