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9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두 번째 조사를 받으러 오십시오.”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면 증거로 채택하는 경향이 짙다. 성범죄 특성상 물적 증거가 있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 말은, 증거로서의 진술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경찰서는 한 쪽 편을 들지 않는다. 수사기관은 중립을 지킬 의무가 있다. 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경찰은 철저히 심문하고 집요하게 따진다.
만약 물적 증거가 없는 경우,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술이 다를 경우엔 더 그렇다.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피해자 입장에서는 정말 고통스러우나, 경찰에서는 철저히 검증하고 묻고 또 묻는다.
경찰조사를 받고 나오면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다.
물론, 내가 당당하고 있는 사실 그대로 이야기한다면 겁날 건 하나 없다. 있었던 일을 기억나는 대로 차분하게 이야기하면 된다. 원한다면 여성 수사관 배치를 요청할 수도 있고, 진술하다가 눈물이 쏟아져도 모두가 조용히 기다려준다.
“저는 남자 수사관이 조사하는 것도 괜찮아요. 필요한 거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경찰조사실에 들어갔다. 타이핑을 하는 경찰을 향해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로펌 상담, 센터 상담, 회사 조사에 이어 몇 번째인지도 모른 채, 그날의 일을 처음부터 다시 진술하기 시작했다.
남자 수사관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질문과 타이핑을 계속했다. 중간에 여자 수사관에게 조사받기도 했다. 조사는 세 시간 가량 이어졌다. 같이 동행한 변호사는 내가 진술하다 몸을 덜덜덜 떨고 눈물을 흘리면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두번째 조사를 받을 때는 조금 힘들었다.
회사는 슬슬 ‘이 정도면 우린 할만큼 했잖아. 됐지? 너가 다른 팀에 가던지 그만두지 않을래?’ 라는 시그널을 보내고 있었다. 가해자는 내가 없는 사실로 본인을 음해하고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사실이 아예 없었다고요, 피해자가 거짓말 하는거에요!”
전해들은 말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때였다.
담당 형사가 추가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했다.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 영상을 틀어 보여주었다. CCTV 영상이었다.
그 안에...모든 게 담겨있었다. 모든 장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가 자행한 최소 4차례의 추행이 모든 장소와 각도에서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형사가 말했다.
내가 사건 직후 바로 고소를 진행했기 때문에
이 영상이 삭제되기 전 구할수 있었다고.
눈물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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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n the darkest night will end and the sun will rise” - Vicor Hugo
어둠은 언젠가 끝나고 태양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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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시리즈를 접하신 분들께*
이 시리즈는 실제 사건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1화부터 정주행 추천드려요.
1화부터 읽기: https://brunch.co.kr/@laylagrace/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