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8
시계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동네 정신과의원을 찾아갔다. 처음이라 긴장되었지만 분위기는 예상보다 따뜻했다. 의사는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치료받아야 할 사람은 안 오고 피해자만 괴롭죠. 수면제 드시고 먹을 걸 꼭 챙겨 드세요.”
로펌도 찾아갔다. 내 사건에 대해 듣고는, 형사고소를 해야 할 건이라고 하곤 선임계약서를 쓰자고 했다.
“선임계약서에 싸인해 주세요, 고소장 접수하겠습니다.”
경찰서 여청수사팀에서도 연락이 왔다. 나에게 피해자 조사를 해야 하니 해당 날짜에 출석하라고 했다.
“피해자 조사를 해야 합니다. 이 날짜에 출석 부탁합니다.”
회사에서는 인사위원회를 개최하겠다고 했다. (이 위원회 이름은 나중에 기사 보도용인지 ‘징계위원회’로 바뀌게 된다.) 나는 참석하지 않고 서면으로 대체하겠다고 했다. 고소장과 그날의 일을 적어 제출했다.
이후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인사위원회가 끝났고, 가해자는 3개월 정직 후 공장 발령 으로 결정 났습니다.”
”왜 징계가 그렇게 낮은가요?“
“기존 성추행 사건 발생 내역이.. 많지는 않았는데…물론 그동안 징계가 너무 가벼웠던 것은 맞습니다만... 당시 내렸던 가장 높은 징계가 6개월 정직이었는데 그 전례를 무시하기 어려웠습니다.“
기존에 너무 가볍게 징계를 내린 감은 있으나 최선을 다했다며 변명했다. 세상이 이렇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회사는 옛날의 ‘전례’에 갇혀 요지부동이었다. 내 사건의 이 말도 안되는 ‘정직 3개월’이 또 이후 발생할 사건에서 ‘전례’라는 이름으로 피해자를 울리겠지.
그 와중 가해자의 입장을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가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주장한다고 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 아니.. 그런 사실이 아예 없었습니다.”
내가 자신을 음해한다는 거였다. 한마디로 무죄 주장.
이젠 내가 당한 사실을 입증할 물적 증거가 없는 한 앞으로 지리한 사실 공방이 이어질 거란 생각이 스쳤다.
그러다 내가 속해있던 소속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내가 인사팀장이랑 얘기를 해봤는데, 자네가 다른 팀으로 가면 어떨까? 아무래도, 여기 기획실에서 계속 근무하긴 어렵지 않겠어?”
이주 전, 이 사건을 보고했을 때 인사실장이 내게 했던 말이 어린잎처럼 시들었다. 그는 떨고 있던 나에게 말했었다.
“피해자의 커리어를 보호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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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 your wounds into wisdom.” -Oprah Winfrey
상처에서 지혜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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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시리즈를 접하시는 분들께*
이 시리즈는 실제 사건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1화부터 정주행 추천드려요.
1화부터 읽기: https://brunch.co.kr/@laylagrace/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