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피해자의 커리어를 보호한다더니

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 8

by 찬란


시계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동네 정신과의원을 찾아갔다. 처음이라 긴장되었지만 분위기는 예상보다 따뜻했다. 의사는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치료받아야 할 사람은 안 오고 피해자만 괴롭죠. 수면제 드시고 먹을 걸 꼭 챙겨 드세요.”


로펌도 찾아갔다. 내 사건에 대해 듣고는, 형사고소를 해야 할 건이라고 하곤 선임계약서를 쓰자고 했다.


“선임계약서에 싸인해 주세요, 고소장 접수하겠습니다.”


경찰서 여청수사팀에서도 연락이 왔다. 나에게 피해자 조사를 해야 하니 해당 날짜에 출석하라고 했다.


“피해자 조사를 해야 합니다. 이 날짜에 출석 부탁합니다.”

​​

회사에서는 인사위원회를 개최하겠다고 했다. (이 위원회 이름은 나중에 기사 보도용인지 ‘징계위원회’로 바뀌게 된다.)​ 나는 참석하지 않고 서면으로 대체하겠다고 했다. 고소장과 그날의 일을 적어 제출했다.


이후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인사위원회가 끝났고, ​가해자는 3개월 정직 후 공장 발령 으로 결정 났습니다.”


”왜 징계가 그렇게 낮은가요?“

“기존 성추행 사건 발생 내역이.. 많지는 않았는데…물론 그동안 징계가 너무 가벼웠던 것은 맞습니다만... 당시 내렸던 가장 높은 징계가 6개월 정직이었는데 그 전례를 무시하기 어려웠습니다.“

기존에 너무 가볍게 징계를 내린 감은 있으나 최선을 다했다며 변명했다. 세상이 이렇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회사는 옛날의 ‘전례’에 갇혀 요지부동이었다. 내 사건의 이 말도 안되는 ‘정직 3개월’이 또 이후 발생할 사건에서 ‘전례’라는 이름으로 피해자를 울리겠지.​

그 와중 가해자의 입장을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가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주장한다고 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 아니.. 그런 사실이 아예 없었습니다.”

내가 자신을 음해한다는 거였다. ​​한마디로 무죄 주장.


이젠 내가 당한 사실을 입증할 물적 증거가 없는 한 앞으로 지리한 사실 공방이 이어질 거란 생각이 스쳤다.

​​

그러다 내가 속해있던 소속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


“그..내가 인사팀장이랑 얘기를 해봤는데, 자네가 다른 팀으로 가면 어떨까? 아무래도, 여기 기획실에서 계속 근무하긴 어렵지 않겠어?”

이주 전, 이 사건을 보고했을 때 인사실장이 내게 했던 말이 어린잎처럼 시들었다. 그는 떨고 있던 나에게 말했었다.


“피해자의 커리어를 보호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Turn your wounds into wisdom.” -Oprah Winfrey

상처에서 지혜를 얻게 된다.



*처음 이 시리즈를 접하시는 분들께*

이 시리즈는 실제 사건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1화부터 정주행 추천드려요.

1화부터 읽기: https://brunch.co.kr/@laylagrace/25


keyword
이전 07화처음으로 얻어 낸 작은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