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세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누구 번호가 필요하죠?

by 찬란
누구 전화번호를 원해요?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에서

변호사도 아니고,

관련 자격증도 없던 에린(줄리아 로버츠)은

600명이 넘는 피해자를 대리해 환경오염 소송을 맡게 된다.


비대해진 사건을 부담스러워한 로펌 보스가 말한다.


“피해자가 너무 많은데, 전화번호도 빠져 있고...“


에린은 대답한다.



“누구 전화번호를 원해요?"




그리고는

600명의 피해자 이름과 전화번호, 병력을 줄줄이 외우기 시작한다.

서류 대신 기억으로 꽉 찬 그녀의 머릿속.

그 순간, 그녀는 자격이 아닌 내용으로 싸운다.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

기록이야말로 사건의 전부일 수도 있다고.



기록이 없을 때

말은 흐려지고,

기분은 바뀌고,

사건은 휘발된다.


그리고 세상은 언제나

제출 가능한 증거를 요구한다.



제 사건이요? 폴더가 열 개였습니다.



메일, 문자, 녹음, 접수증, 영수증, 진단서,

공문 사본, 판결문, 상담 기록,


그리고

”이걸 왜 하는지도 모르겠다“ 라고 써둔

내 일기까지.


웃기지만,

그 파일들이 나 대신 싸워줄 날이 분명히 온다.


기록은 단순한 정리가 아니다.

나 자신을 위한 방어이고, 무기다.

그리고 이 기록을 쌓아가는 사람,

바로 내가 이 사건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내가 겪은 일은 내가 제일 잘 안다.



누가, 언제, 무슨 말을 했는지,

그 말이 메일이었는지, 구두였는지.

그때 나는 어떤 느낌이었고,

무슨 상황이었고,

관련된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내가 아니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다.



그러니 가능하면, 모든 걸 남겨두자.

정리하고, 분류하고,

조금 엉성해도 괜찮으니

아무렇게나 남겨도 좋으니

잊지 않도록 잘 보관하자.


그리고 때로,

그 기록이 나를 회복시키기도 한다.



내 기억은 시간이 지나며 흔들릴 수 있지만,

그때의 기록은 흐려지지 않는다.



당시의 말투, 단어, 날짜까지 정확히 남아

나를 다시 지켜주는 증인이 된다.


“그 때 넌 이랬지만, 잘 이겨냈네.”
“그 때 이걸 남겨둬서,
지금의 네가 더 당당할 수 있었네.”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지지부진하던 사건이

서류 하나, 파일 하나의 등장으로 반전되기도 한다.


내 기록도,

언젠가 그런 반전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다.


성추행 사건 발생 후 매일 썼던 일기가 있었다.

어떤 날짜, 시간에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연락이 왔고,

나는 어떤 곳에 방문했고,

무슨 대화가 오갔고,

당시 내 기분이 어땠는지.


그 땐 막연한 마음으로 모든 걸 적어두었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듯 해도 반드시 기록했다.


이후 사건을 여러 방식으로 재구성할 때였다.

그 기록이 경찰서에서, 노동부에서, 법무부에서,

언론 기사 취재에서 크게 도움되었다.


기록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싸움은

결과가 너무 뻔하지 않을까.


당신이 남겨둔 기록은

미래에

당신을 구할 현재가 될 것이다.



기록은 무기다.

가장 힘든 날, 당신 편에 설 것이다.






*제 이야기를 담은 연재 브런치북을 읽으시면 이해에 도움이 되실 수 있습니다.

용기 내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연재 브런치북] 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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