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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그녀를 잊었지만 나는 그녀를 잊지 못했다.

아보카도씨를 기억하는 건 나뿐인걸까.

by 찬란
이 글은 실화에서 모티브를 받아 창작되었습니다. 실존 인물이나 사건과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요번 고객행사는 말이지, 사원들이 직접 뭔가 공연을 해보면 어떨까?”

딸기상무는 아주 열정적인 일꾼이었다. 약간 구겨진 감색 양복을 입고 헐레벌레 출근해서는, 하루 종일 이리 저리 뛰어다녔다. 바쁜 일이 있나 보다 싶기에는 너무도 항상 같은 모습이었다. 전화를 받다가는 메일을 쓰다가, 또 급히 팀장들을 불러 중간 보고를 받는 식이었다. 그는 약방의 감초처럼 이곳 저곳에 등장하곤 했다. 어느 샌가 회의에 들어와 듣고 있다가 갑자기 아이디어 뱅크가 되어 이런 저런 제안들을 쏟아 냈다.

작게는 소소한 디자인 제안부터…

“그 화면은 말이지, 이익률보다는 영업이익을 억단위로 써보지.“

크게는 엄청난 업무부담까지…

”지금 하시는 그 프로젝트, 진행 경과를 매달 사장님께 보고드리면 어떨까요?“

딸기 상무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렸다. 그의 열정과 아이디어를 높이 사는 이들도 있었다. 주로 윗사람들이었다. 불평불만만 하는 직원보다 얼마나 낫냐는 것이었다.

그의 열정으로 인한 나비효과를 두려워하는 이들도 많았다. 주로 아랫사람들이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일을 사서 한다고 했다.

그랬던 딸기 상무가 내가 주관하는 고객초청행사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다. 그는 바로 이거다 싶은 표정을 지으며 흥분했다. 중국의 VIP 들을 모시고 초청행사를 하는데, 우리 회사 직원들이 직접 뭔가를 하면 얼마나 좋냐며 스스로의 아이디어에 감탄했다. 브리핑을 하던 실무자인 나의 입이 딱 벌어졌지만 옆에 앉은 소속팀장은 박수를 쳐댔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공연 비용도 세이브할 수 있고 고객분들도 좋아하실 겁니다!”

이미 사인 직전이었던 공연팀과의 계약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목구멍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나는 붕어처럼 입만 벙긋벙긋 하다가 “예. 검토해보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났다. 임원이 아이디어를 내고, 팀장이 동의한 이상 이 건은 진행되어야만 했다. 팀장은 말 끝에 항상 ‘어떨까’를 붙여 모두에게 명령하곤 했다. 이거 하면 어떨까, 저거 하면 어떨까. 분명 상대방의 의견을 묻는 것이었지만 속뜻은 명령이었다. ‘어떨까’ 팀장은 나에게 회의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파인애플 대리, 얼마나 좋아. 이번 기회에 예년이랑 다른 행사를 치뤄 보자구.어때?“

”네 팀장님. 알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행사 마지막에, 우리 직원들이 요즘 그 뜨는 댄스음악 ‘노바디’나 ‘강남 스타일’ 같은 거 있잖아. 거기에 맞춰 춤을 추는 거야.“

”하하 좋은 생각이신데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다들 시간이 될런...“

”신나는 음악으로 분위기를 확 띄우는거야, 파인애플 대리가 사회도 좀 보고, 어떨까?“

”하하 네. 분위기 좋게 그럴 수도 있겠네요…어? 네?”




그렇게 대장정은 시작되었다. 그 지난한 일련의 과정은 의외로 빨리 지나갔다. 실무자는 죽을 맛이었다. 아우성을 치는 현지직원들과 수출팀 젊은 사원들을 데리고 안무를 짜서 연습을 시켰다. ‘노바디’와 ‘강남 스타일’이었다. 다들 하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회의실에 한번씩 모여 춤을 연습했다. ‘어떨까’ 팀장은 가끔 구경와서 우리의 비루한 춤실력을 보며 껄껄 웃어댔다. 연습하던 모두 다들 표정이 더 뚱하게 바뀌곤 했다.

“파인애플 대리, 내가 말이야 거래선이랑 약속이 너무 많이 잡혀서 도저히 시간이 안나.”

“파인애플 대리님, 제 아내가 곧 출산이에요…”

“파인애플 대리님, 제가 몸이 심각하게 안 좋거든요. 요즘 소화도 안되고요..”

모두가 만만한 실무자인 나를 찾아와 본인이 빠져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들의 심정을 백분 이해하면서도, 이 행사를 치러내야 하는 책임감이 내 공감능력을 차단시켰다. 싫다는 이들을 요리조리 설득하고 달래고 애원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느 날 업무 중에 메신저 알림이 떴다. 공연팀 중국 현지 직원 아보카도씨 였다.

“파인애플 대리님! 그 공연 댄스에 대해 말씀드릴게 있는데요..”

“아 안돼요, 아보카도씨, 이제 와서 빠지시면..”

“아뇨, 그게 아니고요… 안무를 요렇게 바꾸면 더 호응이 좋을 것 같아서요.”

모니터를 보던 내 눈이 번쩍 뜨였다. 공연 안무에 대해 생산적인 피드백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메신저 내용은 나를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메신저로는 설명이 어려운데, 제가 동영상을 찍어 위챗(중국의 카카오톡)으로 보내드릴게요.”

눈을 의심했다. 모두가 하기 싫다고 아우성인데, 이렇게 열심히 응해 주는 직원이라니… 살짝 눈물까지 고일 뻔 했다.

“아보카도씨, 정말 고마워요. 보내준 그 의견 꼭 반영할게요.”

“네 파인애플 대리님, 고생 많으시네요, 수고하세요~”

“고마워요, 아보카도씨…ㅠㅠ”

아보카도는 나중에 현지 직원들과 함께 연습하고 공연할 때 가장 열정적이었다. 현장을 진두지휘하며 안무를 교정하고 춤을 체크했다. 아보카도의 도움은 정말 컸다. 무대 입장부터 리허설까지 꼼꼼히 도와준 덕에 영원히 될 것 같지 않았던 공연 준비가 얼추 되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내가 한복을 입고 사회를 보았다. “의례 하던 공연이 아닌 정말 특별한 공연을 준비했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무심하던 중국 거래선들이 무대를 바라보았다. 평소 함께 거래하던 아는 영업 직원들이 무대에 올라오기 시작하자 중국 거래선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조명이 화려하게 무대를 비추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한국 아이돌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러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신이 나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오빤 강남스타일~~~!!!!”

음악이 절정에 다다르자 술 한잔 걸치고 신이 난 이들이 무대에 난입했다.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사장이 무대에 올라와 춤을 추자 임원들도 곧 뒤따랐다. 중국 VIP 거래선들도 무대에 뛰어올랐다. 그 중 딸기 상무는 제일 신나서 무대를 장악하고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다같이 강남스타일 말춤을 췄다. 유쾌한 댄스 파티로 행사는 화려하게 마무리되었다.



“파인애플 대리, 아주 성공적인 공연이었어!! 사장님이 대만족하셨다고.“

”감사합니다 팀장님. 다같이 공연한 것인걸요.”

“딸기 상무님도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 내년에는 더 큰 규모로 해보자고 하시던데.”

“……네네. 하하하하“

”이번 공연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지? 현지 직원들까지 같이 연습하느라.”

“아 네네, 그 친구 참 많이 도와줬어요. 상해 지점에 아보카도 씨라고요…”

“허어, 그래??”​

열정맨 딸기 상무는 크게 웃으며 내년 공연을 위해 요즘 유행하는 최신곡들을 듣고 있다는 농담을 해댔다. ’어떨까‘ 팀장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본인이 아는 곡들을 읊었다. 그들은 상해 지점의 아보카도씨에 대해 알게 되자 그녀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열정을 가지고 이 일을 본인 일처럼 도와주었다는 데 나처럼 감복한 듯 했다. 열정맨은 열정맨을 알아보는 법. 딸기 상무는 현지 직원들이 한국 공장으로 와 교육받을 때 아보카도씨를 알아보기도 했다. 아보카도씨는 나중에 나에게 따로 연락해 윗선에 좋게 얘기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파인애플 대리님, 딸기 상무님께 저에 대해 좋게 얘기해주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아니, 도움을 너무 받은 건 나인데, 그렇게 얘기해주다니…아보카도씨, 고마워요.”

아보카도씨와의 훈훈한 우정은 머나먼 국경을 넘어 꾸준히 이어졌다. 수 년을 은은하게 연락하며 지내다가, 돌연 그녀의 퇴사 소식을 들었다. 깜짝 놀라 주변에 물어보니, 듣기만 해도 가슴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그녀가 훌훌 떠났다고 했다. 회사 인연은 스쳐지나가는 시절인연이라지만, 그때 만큼 가슴 아팠던 적이 없었다.

“파인애플 대리, 내년 행사는 좀 더 다양한 공연을 준비하면 어떨까?”

“네 알겠습니다. 아보카도 씨가 없어서 현지직원 중 소통 채널을 새로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아보카도씨? 그게 누구였지?”

어떨까 팀장과 딸기 상무는 아보카도씨를 완전히 잊은 듯 했다. 그녀가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던 메신저 창이 내 눈앞에 아른아른거렸다. 중국 지점의 현지 직원이었던 아보카도씨는 본사의 ’어떨까‘ 팀장과 딸기 상무가 칭찬하자,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그녀가 퇴사하고 얼마 후, 그들은 그녀가 누구인지도 잊어버렸다.

그리고 회사일은 다시 예전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도 그렇게 회사를 다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지내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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