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바보가 되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이 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되었습니다. 실제 특정 인물, 사건과 관계 없음을 밝힙니다.
대기업 임원들도 싸운다. 말로, 메일로, 권모술수로, 그리고, 육탄전까지…
레몬 상무와 토마토 전무는 원래 퍽 친했다. 둘은 살벌한 임원들 사이에서도 호형호제 하는 걸로 유명했다. 레몬 상무는 갓 임원을 달아 ‘새끼 상무’라고 불렸다. 다혈질이었던 그는 호쾌한 성격이었다. 레몬 상무는 허허 웃으며 사무실을 휘젓고 다니며 신입이던 내 이름까지 기억해 주곤 했다.
“파인애플 사원! 아이고 오늘 얼굴 좋아 보이네 으허허.”
사건은 주말에 벌어졌다. 임원들이 다같이 모여 골프를 치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들은 20인승 버스를 대절했다. 그리고 라운딩을 하며 하하 허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늘집에서도 한 잔 했는데, 문제는 기분이 좋았던 레몬 상무가 거나해질 정도로 취했다는 것이었다. 임원들은 레몬 상무를 어찌어찌 달래서 버스에 태웠다. 문제의 레몬 상무는 술 한 잔을 걸치자 라면이 땡기기 시작했다. 그는 휴게소에서 라면을 먹겠다며 버스 기사를 조르기 시작했다. 레몬 상무는 끝내 라면을 먹으며 다른 임원들을 기다리게 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껄껄.. 나는 술을 먹으면 라면을 꼭 먹어줘야 해서요~”
레몬 상무를 태우고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토마토 전무는 레몬 상무의 만행에 심기가 불편했다. 토마토 전무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레몬 상무에게 훈계를 시작했다. 들고 있던 빈 페트병을 휘두르며 새끼 상무로서의 몸가짐에 대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페트병으로 어깨를 탁탁 맞은 레몬 상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둘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옆의 딸기 상무, 자몽 상무는 둘을 말리기 시작했다.
(딸기 상무/자몽 상무) “아이고 좋은 날 왜이러시나들. 자 자 둘 다 진정해요 좀…”
(토마토 전무) ”가만 있어봐요, (페트병을 휘두르며) 내가 새끼 상무 교육을 제대로 못 시켜서 그래…“
(레몬 상무) ”뭐어어? 내가 진짜 참고 참았는데 오늘 진짜 손 좀 봐줘??“
관광버스마냥 작은 공간이 들썩거렸다. 버스는 강남역 사저에 미끄러지듯 도착했다. 어쩔 줄 몰라하던 다른 임원들 사이로 얼굴이 벌개진 레몬, 토마토, 두 임원은 씩씩거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이고오오오오 그만하세요오오 (다른 임원들 말리는 소리)
임원들은 유니폼을 입은 경비원 앞에 앉아 있었다. 그룹 계열사 중에서는 경비업체도 있었다. 그룹 내 임원들이 사저에서 우격다짐을 했으니, 사저 경비담당자들은 비상이 걸렸다. 여전히 씩씩대고 있었지만 한 풀 죽은 레몬 상무와 토마토 전무는 소환 되어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경찰 조사를 받듯 나란히 앉아 이번 사건 경위에 대해 조사받아야 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다른 임원들도 목격자로서 한 명 한 명 순서대로 호명되었다. 임원들은 쪼란히 앉아 그 당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몽 상무 : ”아니 나는 말렸지요, 이러시지들 말라고. 그런데 그냥 뭐 듣지를 않더라고…“
딸기 상무 : ”아휴 그러게 레몬 상무한테 내가 휴게소에서 라면을 먹지 말라고 했는데…“
길었던 주말이 끝나고, 월요일이 되었다. 피로한 얼굴로 출근한 우리는 모두 어리둥절했다. 레몬 상무가 부랴부랴 들어오더니 본인 소지품을 급히 챙겨 다시 나갔기 때문이다. 레몬 상무의 비서에게 슬쩍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레몬 상무가 주말에 다른 임원이랑 싸워서 잘렸다던데??“
”헉! 정말??“
사장의 결정은 전격적이었다. 소리 없이 스리슬쩍 조직도에서 레몬 상무의 이름이 사라졌다. 레몬 상무의 휘하 팀장 한 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급히 레몬의 업무대행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상대방이었던 토마토 전무의 이름도 조직도에서, 사라졌다. 싸움을 말리던 딸기 상무는 병가로 화요일에서야 출근했다. 넘어져서 인대가 늘어났다고 했다.
”어쨌든 둘 다 집으로 가시게 되었네.“
”라면 하나가 여러 명 인생을 바꿨어.“
사람들은 모여서 수근거렸다. 소문은 처음에는 솜사탕처럼 가벼웠다. 하지만 각자의 해석과 정보가 주석으로 달리기 시작하며 미역국처럼 진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십들이 그렇듯, 잠시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이내 사건은 모두에게 잊혀져 버렸다.
이 사건의 가장 주요 등장인물은 누구였을까? 라면 때문에 하극상을 일으킨 레몬 상무? 페트병으로 꼰대짓한 토마토 전무? 말리다가 새우등 터진 자몽과 딸기 상무? 아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수박 상무’였다. 왜 이제서야 등장하냐고? 그는 이 사건 내내 레몬 상무와 토마토 전무의 싸움 곁에 있었던 임원들 중 한 명이었다. 사실 그는 레몬 상무의 바로 옆 자리에 앉기도 했었다. 이런 주요 인물이? 경비업체에서는 수박 상무를 불렀다.
“레몬 상무와 토마토 전무 사건에 대해서 아시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아! 그 사건 말입니다…”
수박 상무는 미소를 지으며 경비 직원을 바라보았다.
“그 사건이 있었다는 건 들었는데, 제가 아는 게 없어서 말씀드릴 수가 없겠네요.”
“네? 레몬 상무 바로 옆자리 아니셨나요?”
수박 상무는 다시금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그 때 음악을 듣고 있었거든요. 아주 시끄러워서,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답니다. 허허…”
수박 상무는 그 때 ‘눈을 감고 음악 감상 중이었다’고 했다. 따라서 자신은 본 것도, 들은 것도 없으며 아는 바가 없노라고 답했다. 그렇게 수박 상무는 이 사건에서 비껴갔다.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추궁할 수도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를 평소에 알고 지내던 이들은 혀를 내둘렀다. 수박 상무가 음악을 듣는 취미가 있다는 건 난생 처음 듣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옆에 동료들이 싸우고 있는데 음악을 들을 수가 있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대놓고 그 질문을 수박 상무에게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새로운 소문 두어 개가 산들바람처럼 회사를 스치고 지나갔다. 버스 안에서 레몬과 토마토가 언성을 높이며 말싸움을 시작하자, 수박 상무가 급하게 가방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찾아내더라고 했다. 그렇게 버스가 시끌벅적했던 와중, 수박 상무는 쓴 지 아주 오래 되어 보이는 이어폰을 꺼내어 먼지를 탁탁 털었다. 그리고는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눈을 감더라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전해졌다.
그렇다. 회사생활은 수박 상무처럼 해야 했다. 옆에서 싸움이 벌어져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눈을 감는 것. 반으로 쪼개지기 전까지 속살을 보여주지 않았던 수박 상무. 그는 이 이야기의 진주인공이자 숨겨진 히로인이었다.
싸운 사람은 잘리고, 말린 사람은 병이 났고, 못 들은 사람은 승진했다.
회사는 늘 그런 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