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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애플 대리, 수용소의 하루

퇴직한 날 써내린 나의 하루

by 찬란

“엄마!! 나 똥 쌌어! 배 아파.“

“여보, 우리 집 와이파이 이거 맞지?”

“파인애플 대리, 그 보고서 준비 다 됐나?”

내 CPU를 풀가동한다. 모두를 불만족스럽게 하더라도 일단 대답부터 해야 한다. 그런 후에 상대방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일단 손을 마구 휘저어 딸아이를 조용히 시킨다. 그리고 음소거 해제 버튼을 누른다.

”네 팀장님. 제가 마지막 확인해야 할 숫자가 있는데 십 오분 뒤에 초안 보고 드릴게요.”

음소거 버튼을 다시 누른다.

“똥 쌌어? 이리 와 봐 엄마가 도와줄게. 배 아프면 매실 타다 줄까? 와이파이는 그거 맞아 여보.”

대충 상황을 정리한 후 자리에 앉았다. 팀장님을 화상회의에 호출한다. 준비 중인 보고서에 대해 논의한다. 딸기 팀장은 보완 사항을 지시한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잔뜩 덧붙이기도 한다. 숙제를 잔뜩 받아 나왔다. 커피, 커피가 필요하다.

아침식사도 제대로 치우지 못한 부엌을 외면하며 커피 머신을 켠다. 커피 한 잔을 급히 내리고 있는데 딸이 다리에 매달린다. 티비를 보여달라는 것이다. 요거트가 입에 묻은 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뽀로로를 보겠다고 한다. 세상 절절한 표정치고는 요구사항이 간단하다.

“엄마, 나 티비. 뽀요요, 뽀요요…”

내 시선의 끝이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요거트 껍질에 머문다. 안 돼, 실랑이할 시간이 없어. 보고서를 마무리 해야 해. 체념한 표정으로 딸에게 뽀로로를 틀어주고는 다시 노트북 앞에 앉는다. 바로 옆자리에서 남편이 재택 근무 중이다. 급히 허리를 곧추세우더니 전화를 공손하게 받는다. 높은 사람인가 보다.

“아, 상무님, 안녕하십니까. 네네, 아닙니다. 통화 괜찮습니다..”

하염없이 공손하고 예의 바른 남편을 간접 체험해 본다. 기분이 묘하다. 안쓰럽기도 하고 조금은 웃기기도 하다. 남편의 겸손한 모습을 계속 감상하고 싶은 마음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동시에 든다. 그런 생각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나에게도 전화가 온다. 이번엔 내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전화를 받을 차례다.

“아 팀장님, 안녕하세요. 네, 보고서 그 부분을 더 수정해서요, 네 가능하죠. 당연하죠…”

전화를 하는데 딸이 리모컨을 들고 뒤뚱뒤뚱 걸어온다. 다음 편을 계속 틀어달라는 요구인 것 같다. 핸드폰을 한 쪽 귀에 걸치고 오른손으로는 뽀로로 다음 편을 틀어준다. 동시에 물티슈를 바닥에 던졌다. 발로 요거트가 묻은 거실 바닥을 대충 닦는다. 얼추 닦였기를 바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시 보고서 파일을 열었다. 해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그렇게 나의 재택 근무 일상은 꾸역 꾸역 계속되고 있었다.

코로나 시국이었고 모두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파인애플 대리, 그룹실입니다.”

“앗 안녕하세요! 네네, 무엇이 필요하신가요?”

“일단 초안 봤는데요, 전략을 한 페이지 더 보강하고 싶어서요.”

“전략이요? 어떤 보강을…”

“우리 그룹의 새로운 비전 ‘과일나라 번영하라’을 위해 각 공장에서 어떤 걸 하냐는 겁니다.“

”어……”

그놈의 비전, 이름만 매번 바뀌지 결국 하는 건 똑같은데.

비전을 ‘과일나라 영광의 10년’로 하던,

‘과일왕국 매출 30조 달성’로 하던 무슨 소용인가.

그 비전이 그 비전이었다.

결국 하는 활동은 비슷했다.

“그건…제가 마음대로 쓸 수 없는 부분인데요. 공장들이랑 다시 얘기해 봐야 하는데…당장 내일 보고자료에 넣기는 좀 시간이 많이 급하네요.”

안 된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상대는 그룹실이니까.

”그래야 모양이 예뻐져서 그래요. 내일까지에요.“

툭, 전화가 끊겼다.


이제 이 영양가 없는 발표자료를 만드는 일이 남았다. 같은 활동 내용을 이 비전에 맞추고 저 성과에 집어넣는다. 그럴싸하게 포장한 후 여러 방법을 동원해 뽑아낸 숫자로 실적을 만들어 보고한다. 그러다 보니 그룹실은 점점 ‘보고를 위한 보고’, ‘모양이 예쁜 보고’에 집착한다.

”내일 각 공장에 전화를 돌려야겠네. 하루 안에 과일 나라 비전에 대한 세부 전략을 세개씩 내라고. 아…또 공장에서 욕 먹겠네…”

내가 하는 일이 과연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일일까. 무력감과 회의감이 썰물처럼 밀려들었다. 예전에 고생하면서 영업을 뛰던 때가 떠올랐다. 실제로 내가 이익에 기여하고 있다는 효능감이 들었을 때. 적자 상품을 흑자로 돌렸을 때. 그 땐 고생해도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무의미한 보고서 포장을 위한 작업은…

“아…야근 확정이네…”

티비가 지겨워진 딸아이가 나에게 안겼다. 그러나 제대로 안아주기도 전에 주스가 엎질러진 바닥이 눈에 보였다. 내가 짜증을 내며 끈적해진 거실 바닥을 닦자 딸아이는 나의 눈치를 보며 쭈뼛거렸다. 순간 죄책감에 마음이 울컥했다. 하루 종일 티비를 본 딸아이. 같은 집 안에 있어도 아이는 엄마가 고팠다. 미안했다.

“아이고, 애도 엄마도 고생이네. 일 해라, 내가 애 데려가 내일 데려올게.”

“아…엄마, 고마워요…”

다행히 가까이 사시던 친정어머니가 들러 딸아이를 데려갔다. 그룹실과의 통화 후폭풍으로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부엌은 아직까지도 아침 점심이 널부러져 있었다. 급하게 집 앞 김밥집에 갔다. 남편을 위한 참치 김밥과 내가 좋아하는 샐러드 김밥을 주문했다. 오늘은 샐러드 김밥이 품절이 아니었다.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김밥을 꾸역꾸역 씹으며 한참을 일에 파묻혔다. 불현듯 시계를 봤다.

10시 30분.

“도저히 안 되겠다. 좀 쉬고 내일 하자.”

대충 부엌과 거실을 치웠다. 남편은 아직까지도 눈이 퀭한 채 근무 중이었다. 같이 고생하는 남편의 모습에 마음이 시렸지만 그 마음을 표현하지도 못한 채 나는 잔소리를 했다. 널부러진 아이스크림 막대와 김밥 포장지를 주우며 먼저 자겠노라고 했다. 남편은 대꾸할 힘도 없어 보였다.


컴퓨터를 끄려고 마우스를 달칵달칵 하는데 새로운 메신저가 반짝였다. 선배 홍시씨였다. 그는 굉장히 난처해 하면서 나에게 전언할 것이 있다고 했다. 직속 상관이었던 두리안 상무가 보고자료를 맡았던 나에게 할 말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중요한 보고자료를 만드는 사람은, 밤을 새야지!!! 매일 9시, 10시 퇴근이 뭐야???“

그는 차마 나에게 직접 소리 지를 용기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그저 만만한 홍시씨를 세워놓고 나를 향한 것이 틀림없는 비난을 해 댔다. 두리안 상무의 흥분은 점차 풍차처럼 자가 발전했다. 그는 침을 튀기며 홍시씨에게 고성을 질러댔다. 안 그래도 시뻘갰던 홍시씨의 얼굴이 터질 것 같이 붉어졌다. 그는 나 대신 그 원성을 다 받아 낸 후 나에게 어렵게 그 말을 전했다.

”그…두리안 상무님이 파인애플 대리님이 밤을 안 새신다고…화가 나신 것 같아요.“

”허…“

기가 턱 막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업무가 아닌 근무시간 근태를 가지고 소리를 지르는 임원은 또 처음이었다. 두리안 상무는 비단 나 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래도 나아진 거야, 예전엔 물병도 날라다녔어… 그의 과거를 경험했다던 이는 그렇게 격려 아닌 격려를 했다.

”라임씨는 두리안 상무에게 당해서 혈변도 눴어.“

”누구는 밤 두 번 새고 육아휴직 가버렸잖아.“

”오이씨는 같이 두리안 상무한테 소리 지른 후에 다른 팀으로 방출됐다던데?“

이번에는 내가 타겟이 된 모양이었다.

”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오히려 여기에 말려서 밤을 새기 시작하면 안 돼. 그랬다가는 본격적인 두리안 상무의 욕받이가 될 거야.

담담하게 컴퓨터를 껐다. 보란 듯이 퇴근해야 했다. 두리안 상무와의 기싸움은 천천히 하자. 내일은 보고서를 마저 마무리하고 딸아이를 좀 더 안아줘야겠어.

배게에 머리를 파묻고 눈을 감았다.

나는 임신 8개월이었다.



그날 하루는 순조로웠다.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두리안 상무가 나에게 직접 소리지르지도 않았고, 엄마가 딸아이를 데려가서 야근도 잘 할 수 있었다. 아침에 배가 아프다던 딸아이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나았다. 그룹실에서 요청한 자료도 잘 작성했고, 저녁에는 좋아하는 샐러드 김밥을 먹기도 했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이렇게 파인애플 대리는 무려 십 오년을 보냈다.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5,512일을 보냈다. 나흘을 더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5년간 대기업에서 일하다 퇴사한 날 쓴 글입니다. 너무 좋아하는 소설을 오마주해서 써 보고 싶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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