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출근했다가 닥친 위급상황
“파인애플 대리, 주말에 미안한데 지금 통조림 공장이 꺼졌어.”
“네에?? 그래요??”
“그래서 지금 회사에 나와서 보고서를 좀 써야 할 거 같은데, 집이야?”
“앗…네. 그런데 지금 시어머님 환갑이셔서…”
“아이구 하필 날이 그러네.”
“아 네…”
“…”
“…”
침묵을 견디지 못한 나는 좀 있다가 자리를 마무리 하고 회사로 가겠다고 했다.
“그 제가 여기 마무리를 좀 하고요, 이따가 출근하겠습니다.”
“그래, 난 미리 좀 나가 있을게.”
“(아 더 불편한데…) 네. 알겠습니다.”
시어머님 환갑이라 조촐하게 가족끼리 모였다. 어머님은 원래 생일 안 챙긴다며 극구 사양하셨지만 내가 억지로 마련한 자리였다. 아직 요리가 서툴렀던 나는 밀키트 갈비찜과 배달 잡채를 동원했다. 마치 내가 만든 양 그릇에 열심히 옮겨 담자 어머님 아버님이 도착하셨다. 며느리가 준비한 음식과 환갑 축하 선물에 두 분은 놀랐다. 모든 식구가 배부르게 먹고 디저트를 먹고 있을 때, 나는 회사에서 전화를 받았다.
주말이지만 공장이 꺼졌으니 출근하라고.
“어머님 어쩌죠, 제가 지금 회사에 나가 봐야 해서…”
“그래 당연히 가 봐야지. 우리 다 먹었다. 이제 나가 보마.”
산더미같이 쌓여있던 그릇은 남편이 담당하겠다고 했다.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어머님은 어서 회사에 가 보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온몸에서 갈비찜 냄새를 풍기며 부랴부랴 회사에 도착했다. 적막한 사무실에 딸기 팀장이 앉아 있었다.
“주말에 불러내서 미안해. 통조림 공장이 급히 터져서 월요일 아침 바로 보고해야 하거든.”
“아 네 팀장님, 제가 작성 시작하겠습니다…”
전화를 돌려서 급히 자료들을 받았다. 통조림 공장이 꺼진 이유, 그리고 생산 차질 물량, 그리고 그 물량으로 인한 손해 금액, 앞으로의 대안… 이 모든 것들을 담은 보고서를 써서 월요일 아침에 CEO에게 보고해야 했다. 토요일 저녁에 메일로, 월요일 아침에 구두로.
두어 시간 엉덩이 한 번 못 떼고 일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전화와 메일, 보고서 작업에 정신 없던 내가 몸에 이상을 느꼈다. 배가 살살 아프며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앗, 그런데… 이 느낌, 이 감각. 이건…
아, 터졌다…! 그날이 왔구나…!!
모든 여자가 가장 싫어하는 그 날. 여자라면 매 월 겪는 일임에도 여간해서는 익숙해 지지 않는 느낌. 하필이면 그 친구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순간 나를 찾아왔다.
“하하, 나야, 또 왔어. 잘 지냈지~~?”
하지만 나는 지금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일단 불에 데인 듯 벌떡 일어났다. 약간 놀란 듯한 딸기 팀장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아…어떡해…어떡해…어떡해…!!!!”
의자에 살짝 남은 흔적. 그것을 발견한 순간 나의 모든 모공이 확 열리며 땀이 나기 시작했다. 팀장이 내 쪽을 보지 않기를 바라며 급히 수습하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 봤을, 그리고 누구나 상상은 해 보지만 겪고 싶지 않을 일이 지금 벌어졌다.
“생리대도, 바지도 없는데…어떡하지? 지금 당장 가서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이 와중에 눈치 없는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하하, 나 왔다니까, 반가워 해줘~”) 일단은 부랴부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달려갔다. 편의점에서 생리대를 산 나는 임시방편으로 응급처치를 했다. 이제 문제는 바지였다.
도대체 주말에 이 황량 적막한 이 사무실에서 여자 바지를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일단 밖으로 뛰어 나왔다. 지하상가에 가면 여자 옷을 파는 상점이 있었던 듯도 했다. 그런데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주말 지하상가는 유령도시처럼 적막했다. 황망하게 건물 밖으로 뛰어 나왔다. 어디든 옷을 파는 곳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어디서? 편의점에서 바지를 팔리는 만무하고, 그 흔한 길거리의 옷집도 그날 따라 모두 문을 닫았다.
“딸기 팀장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왜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나 할 텐데…”
땀이 주르륵 주르륵 나기 시작했지만 땀을 닦아낼 정신도 없었다. 어쩌지, 어떡해, 한 시간 거리의 집에 다녀올 수도 없고, 네이버 지도에 옷집을 검색해도 안 나오고. 보고서는 아직도 첩첩산중인데. 조금 있으면 저녁 시간인데. 얼마나 당황했는지 눈앞이 핑 도는 것처럼 느껴졌을 시점이었다.
“악!! 찾았다!!!!”
아주 작은 옷집을 찾아냈다. 인상이 푸근하신 아주머님이 앉아 계셨다.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보고계시던 아주머님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젊은 여자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오니 무척 당황하셨다.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도 없었다. 누구나 입기 좋아 보이는 검은 면바지를 눈대중으로 대충 보고 집어들었다.
“헉…헉… 사장님, 이거… 이거 얼마에요…”
“??? 어, 이거… 이만원이에요.”
“헉..헉…주세요…여기…이만원…”
“앗, 네. 그리고 반품 교환은…”
“반품 안 할거에요, 저 갈게요!!!!!!”
바지 한 벌을 집어든 파인애플은 또 다시 하이힐을 신고 달렸다. 화장은 지워지고 땀으로 범벅이 된 채로 회사 화장실에 뛰어들어갔다. 바지를 갈아입고 엉망진창이 된 내 모습을 얼추 수습한 후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갔다. 딸기 팀장이 나를 흘끗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묻지는 않았다. 컴퓨터를 켜고 내가 자리를 비운 시간을 확인했다. 거의 40분. 메신저와 메일이 잔뜩 와 있었다. 살짝 모니터에 비친 내 모습이 아주 초췌했다.
“수고했어 파인애플 대리, 뭐 또 있으면 연락할게.”
“네 팀장님, 들어가세요~”
“저녁이라도 먹고 들어갈래?”
“아…아닙니다. 집에 남편이 기다리고 있어서. 먼저 들어가셔요!”
얼기설기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팀장이 감수를 마친 후 임원과 CEO에게 보냈다. 질문 세례가 쏟아지겠지만 그건 또 그 때 생각해야겠지. 몸 상태는 최악이었지만 어쨌든 끝났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렸다. 잊고 있던 복통이 다시 돌아왔다. 생리통약 먹는 것도 깜빡했던 것이다.
“나라니까 나~ 매달 오는 데 왜 안 반가워해주는 거야. 하하하~”
자리를 정리하고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데 카톡이 왔다. 어머님이었다.
<오늘 잘 먹었다.>
어머님은 다정다감한 분은 아니었다. 항상 무덤덤하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분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신경’이라고 생각해 상처를 받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편안한 품성이 고마운 것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나에게 무엇도 요구하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어머님 생신을 잊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 해인 환갑에는 꽤나 열심히 준비해서 어머님께 대접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일상을 차려놓고 일해야 한다며 중간에 나와버렸다. 바로 오늘.
인스타나 유튜브에 나오는 거창하고 화려한 생일상도 아니었고
그저 밀키트 갈비찜과 배달 잡채뿐이었는데.
카톡을 읽으며 정신 없이 전철에 올라탔다. 어머님께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어머님, 오늘 죄송했어요. 공장이 갑자기 꺼져서. 다음에 더 맛있는 것 또 많이 해드릴게요.>
<고생이네.>
평소 같았으면 어머님 참 여전히 무심하시네~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화도 거기서 강제종료 되고.
‘이렇게 짧게 대답하시는데 내가 뭘 더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방금 바지 한 벌을 사기 위해 땀 범벅이 되어 온 동네를 뒤졌다. 새로 산 이 바지는 약간 가슬가슬했지만 유연제를 넣고 잘 빨면 부드러워지겠지. 그리고 나를 구원해준 아주 소중한 바지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길게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네 어머님, 오늘은 좀 고생했네요, 저 오늘 바지 하나 샀지 뭐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