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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펜 부장

회사에 남은 마지막 장인, 대체불가 실무자

by 찬란

"파인애플 대리, 그 분기전략회의자료 다 되었어?"

"아 네네, 제가 마무리 조금만 하고 보내드릴게요."

"그래."


무뚝뚝한 빨간펜부장이 말을 걸면 항상 나는 긴장했다. 빨간펜 부장은 늘 과묵했다. 항상 고개를 푹 숙이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리에는 엄청 오래 된 듯한 서류더미와 두꺼운 책들이 쌓여 있었다. 세금이나 회계에 대한 책들이었다.


"부장님, 여기 요청하신 표 다 만들었습니다."

"가만, 여기..."


신입사원 때는 그저 무서웠다. 빨간펜 부장에게 서류 하나 들고 갈 때마다 긴장했다. 빨간펜 부장은 내가 프린트해간 보고서를 받아들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빨간펜을 집어들곤 했다.


"가격 유지라고 쓰지 말고 보합이라고 써."

"여기 줄 간격은 10으로 해."

"말 너무 많이 쓰지 마, 간결하게 해."


빨간펜 부장이 빨간펜으로 내 보고서를 휙휙 난자할 때면 가슴이 좀 아팠다. 한 장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더 난감했던 것은 그의 악필이었다. 빨갛게 죽죽 그은 후 코멘트를 적었는데 도통 뭐라고 썼는지 알 수가 없는게 스트레스였다. 그럼 나는 또 이걸 들고 자리로 가야 했다.


"부장님, 저 그... 여기 빨간색으로 쓰신거, '증설 현황' 이라고 쓰신거 맞죠?"

"......"


대답이나 시원하게 해주면 좋으련만, 그냥 묵묵부답이거나 보일듯 말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뜻으로 생각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많게는 하루에 수십 번을 그의 자리에 들락날락해야 했다. 나중에는 의자를 가지고 와서 그의 옆에 앉아 한참을 듣기도 했다.


"우리 빨간펜 부장은 말이야~~ 아주 끝내주는 실력자라, 없으면 우리 사업부가 안돌아가지~~"


그는 대단한 실무자였다. 회식 자리에서 모든 팀장과 임원들은 빨간펜 부장을 칭찬했다. 그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고 침을 튀기며 강조했다. 그럼 옆에서 고개를 푹 쳐박고 고기를 집어먹던 빨간펜 부장은 별 대답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회사에서 30년을 근무한 부장급이었음에도, 그는 전사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그는 일하느라 자주 점심을 걸렀다.


"그런데 우리 사업부장은 우리 빨간펜 부장을 팀장 한 번 안 시켜주고 말이야. 흐허허."


회식자리에서 사람들은 공치사에 곁들여 한 마디씩 덧붙였다. 그가 실무를 너무도 잘 해내는 부지런한 직원이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임원들은 그에게 팀장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는 자료를 공유하는 편이 아니었다. 전사에서 빨간펜 부장 혼자 아는 지식들이 너무 많았다. 그는 대체 불가한 존재가 되었지만, 윗자리로도 갈 수 없게 되었다.


"빨간펜 부장이 너무 실력이 좋아 대체할 사람이 없으니까..."

"후임을 양성하고 이제 팀장을 하셔야 하는데 할 사람이 없으니까..."


모두가 그의 만년 부장생활을 안타까워했다. 모든 회사 보고자료가 그의 손을 거쳐야 완성되었다. 그는 가장 부지런하고 각종 지식으로 꽉 찬 직원이었다. 그러나 회사 결재라인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그런 와중 나와 후배 라임씨가 빨간펜 부장의 보조 역할을 맡게 되었다.


"파인애플 대리, 빨간펜 부장 잘 보좌해야 해. 까다로우신 분이야."

"네, 잘 맞춰 드려야죠. 배울 게 너무 많은 분인데."


라임씨는 조금 생각이 다른 듯했다.


"파대리님, 저는 사실 빨간펜 부장님처럼 하고 싶지 않아요."

"뭘요?"

"회사에 충성하고 모든 걸 바치는 거요. 저는 월급 받는 만큼 일하고, 여유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고 싶어요."

"아...그것도 당연히 현명한 방법이죠."

"저 요즘은 임장 엄청 다녀요. 요즘 마포가 그렇게 핫하대요. 험한 동네였는데, 개발을 많이 했거든요, 아현 뉴타운이라고요..."


라임씨는 여러모로 빨간펜 부장과 상반되는 인물이었다. 회사 일은 적당히 욕먹지 않을 정도로만 하자는 주의 같았다. 이문에 밝았고 이것 저것 아는 것도 많았다. 재테크를 부지런히 해서 자산을 불려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이도 저도 되지 못했다. 빨간펜 부장처럼 회사에서 인정 받고 싶었지만 동시에 라임씨의 말도 백번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빨간펜 부장님이라면 회사랑 딜을 잘 해서 팀장 뿐만 아니라 임원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정도 내공이 있는 분인데.


"파인애플 대리, 이 자료..."

"네네 부장님..!"

회사 일로 바쁘면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부족했다. 라임씨를 비롯한 다른 직원들이 다 퇴근을 했을 때에도 나와 빨간펜 부장은 남아있었다. 함께 야근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빨간펜 부장은 나에게 점점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30년 전 회사 서류를 들고 뛰어 다닌 이야기, 외국인 임원이 보고서를 눈 앞에서 집어 던진 이야기...


그러다 나와 빨간펜 부장과의 관계가 달라진 사건이 생겼다. 부사장님이 나를 찾아와 나에게 단독으로 그룹 보고용 자료를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다.


"내가 그룹에 보고를 해야 하는데, 자네가 좀 해볼 수 있나?"


빨간펜 부장을 패스하고 나 혼자서 자료를 만들게 되었다. 빨간펜 부장 도움 없이.


빨간펜 부장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안경을 닦고 있었다. 나는 죄책감과 묘한 흥분이 뒤섞인 채로 그룹 보고 작성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잘 해내고 싶어, 빨간펜 부장에게 인정받고 싶어.






그룹보고는 2시였다. 마지막 수정은 부사장님이 내 옆에 직접 앉아 지시했다. 나는 땀을 흘리며 마지막까지 자료를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최종본이 완성된 건 1시였다. 부사장님은 5부를 프린트해달라고 한 후, 그 자료를 손에 들고 바로 그룹 실로 향했다.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점심도 못 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배고프다. 내려가서 삼각김밥이라도 먹고 올까.


넋이 빠져 있는데 4시 반에 메신저가 울렸다. 그룹실의 우리 회사 담당 상무님이었다.


"파인애플 대리님"

"엇...그룹실에서 저에게 연락을 주시다니, 안녕하세요 상무님."

"오늘 부사장님께서 그룹에 오셔서 그룹실에 보고를 하셨습니다."

"아 네네, 잘 되셨는지요?"

"저도 배석을 했었구요. 이 자료를 파인애플 대리님이 만드셨다고 하던데..."

"네, 맞습니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어떻게, 잘 된거야?



"자료가 잘 만들어져서, 이 파일이랑 데이터를 저한테도 따로 보내주실 수 있으신가 해서요."



따흑!!

성공했다, 성공했어.

내가 잘 해냈구나.



"아 네네 그럼요, 제가 보내드리겠습니다."



자료에 걸린 보안을 풀고있는데 갑자기 흠칫 놀랐다. 옆에 빨간펜 부장이 와 있었다.



"부장님!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보고는 잘 끝났나..?"

"네 방금 그룹실에서 연락 왔는데 잘 끝났다고 하시네요!"

"그럼..나도 자료 한 부 보내 줄 수 있나?"

"아...그럼요!"



보안상 보고가 완료될 때까지 누구에게도 송부하지 못한 내 보고 자료. 나는 빨간펜 부장에게 자료를 보냈다. 이 순간, 나는 심사결과를 기다리는 쇼미더머니 참가자처럼 얌전했다. 달칵달칵, 빨간펜 부장이 내 자료를 훑어보는 듯 한 마우스 소리가 들렸다.



"......잘했네."



그 과묵한 빨간펜 부장에게서 받은 첫 칭찬이었다. 그마저도 고개를 푹 숙이고 책상을 향해서 한 말이라 내 청력이 좋지 않았다면 못 들을 뻔 했다. 옆 자리의 라임씨가 메신저로 키득거렸다.



"오올~ 파대리님 기분 좋으시겠어요~~~"

"우리 빨간펜 부장님이 왠일이실까요, 하하."

"고생하셨네요, 엄청 시달리셨잖아요. 그런데, 그 제가 얘기한 마래푸 말예요..."



우리는 메신저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마포래미안푸르지오와 경희궁자이가 아주 핫한 이슈였다.





이후에 나는 다른 사업부로 옮겨가 영업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전사기획팀 발령을 받았다. 내가 만드는 자료의 퀄리티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올라가면 그룹실에 올리는 보고를 매일같이 만들게 될 것이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회사 안에서 내 능력을 인정받는다고 생각되니 기분은 좋았다. 이제 원래 하던 영업 업무를 인수인계 해야 했다.


"파대리님! 전사기획팀 가시면 저랑 임장 얘기도 못하고 어떡해요?"

"아 그러게요 라임씨...저도 정말 내키지 않아요."

"진짜 싫으시겠다. 거기 간다고 월급 더 받는 것도 아니잖아요."

"맞죠..."

“저 다음주에 마래푸 계약하려구요…”


라임씨는 나의 기획팀 발령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인수인계 자료를 만들며 정신없이 야근하던 와중이었다.


"우리 파대리~"

"아이고 깜짝이야! 빨간펜 부장님!!!!"


조용하고 어두운 회의실에 빨간펜 부장이 옆에 와 서 있었다. 화들짝 놀랐지만 반가웠다.


"부장님, 오늘도 야근하세요?"

"파대리, 전사기획팀 간다며?"

"아 네, 맞아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부장님."

"축하해."

"앗...감사합니다. 그런데 축하받을 만한 일이 아닌거 같아요. 하하"


엇? 그런데..


"어? 그런데...부장님, 방금 저한테 <우리 파대리>라고 하셨어요?"


내가 히죽히죽 웃으며 놀려도 빨간펜 부장은 말쑥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파대리를 보며 느끼는 게 있었지."

"저를요....? 뭔데요 부장님?"

"모두에게 잘 공유해주고, 친절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거."

"아......"


<기획팀에 가는 건 좋은 일은 아닌데요. 그리고 부장님이 너무 공유 안해주시긴 했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 눌렀다. 이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부장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서 잘 할거야. 난 못 가봐서 아쉬웠거든, 파대리는 잘 할거야."


풍문으로 들었던, 그에게 스쳐 지나갔다던 많은 기회들이 생각났다. 그는 수많은 임원들을 모셨다. 그 임원들은 하나같이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내주지 않았다. 임원들은 여러 이유들을 갖다 붙이며 그를 붙잡았고 그는 그렇게 사업부의 자료부장으로 남았다. 전사기획팀도 분명 그가 떠나 보낸 기회 중 하나였으리라.


"부장님, 그동안 감사했어요. 앞으로도 많이 배우러 갈게요."

"그래."


휘적휘적 걸어가는 빨간펜 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 모습은 정말로 멋지고 대단했다. 멋지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내 안에서만 맴돌았다.


라임씨라면 고개를 저었겠지만,

나는 빨간펜 부장의 그 등을 존경했다.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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